독립운동가 글씨체를 내 손으로, ‘독립서체’ : 윤봉길 서체, 한용운 서체

2019년은 3.1운동이 일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GS칼텍스는 과거 독립운동을 지원했던 GS그룹 이념에 기반하여 현재 남아있는 기록으로나마 찾아볼 수 있는 독립운동가 몇 분의 필적을 정식 폰트로 개발, 배포하는 캠페인을 진행합니다. 즉, 나라를 위해 몸 바쳤던 독립운동가분들의 정신을 이어가기 위한 새로운 형태의 ‘독립서체’ 캠페인입니다.

이번 ‘독립서체’ 캠페인은 파편적인 기록으로 남아있는 일부 독립운동가분들의 글씨체를 모아 연구, 전문 폰트 개발업체와 협업, 당시의 글씨체를 현대에 맞게 복원·제작하고자 기획되었습니다. 실제 독립운동가분들의 한글 필적을 찾아 연구, 현대에 맞게 재해석한 것이기에 많은 조사와 연구가 선행되었는데요.

GS칼텍스는 먼저 일제강점기 때 ‘님의 침묵’ 등을 출판하며 저항문학에 앞장서고,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3.1 독립선언을 이끈 한용운 독립운동가, 그리고 일왕의 생일날 행사장에서 폭탄을 던져 일본군 대장 등 주요인물을 처단해 대한독립운동에 중요한 방점을 찍은 윤봉길 독립운동가의 글씨체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독립서체 ‘윤봉길’ 서체, ‘한용운’ 서체는 무료 배포 폰트로, 배너를 클릭하면 다운로드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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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 속에서도 나라를 사랑했던
감옥 속에서도 독립을 설파했던 만해 한용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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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침묵’에서는 ‘님은 갔다’고 말하며 객관적인 현실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다’고 덧붙이며 주관적인 의지로 ‘님은 자기와 함께 있음’을 강조하는데요. 이는 조국이 일본의 식민지 치하에 있지만, 자신은 여전히 조선을 독립된 조국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드러냈다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시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용운은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자 민족 독립을 위해 끝까지 변절하지 않고 민족의 자존심을 지킨 사람입니다.

1910년, 한일 강제 병합으로 나라를 빼앗기자, 한용운은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는데요. 그는 중국과 만주, 시베리아 등을 돌아다니며 흩어져 있는 독립군 부대를 방문해 격려했습니다. 또 1919년 3.1운동 때는 독립선언서의 행동 강령인 ‘공약 3장’을 썼으며, 민족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기도 했죠.

최후의 1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활히 발표하라

한용운은 만세 시위를 펼치다가 일본 경찰에게 현장에서 붙잡히게 됩니다. 결국 그는 감옥살이를 피해갈 수 없었는데요. 감옥에서도 당당하고 의연한 모습을 잃지 않았다고 합니다. 특히 그는 옥중에서 조선독립을 갈망하며 ‘조선 독립의 서’를 집필하기도 했는데요. 인간의 권리, 자유와 평등에 대한 길을 가로막는 어떠한 형태의 무력, 군사력, 압제 정치는 결국 스스로의 덫에 걸려 스스로 패망하게 되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집필 중 일제에 발각되어 원본을 형사에게 제출할 수밖에 없었는데, 한용운은 ‘조선 독립의 서’를 일본인 서울지방법원 검사에게 제출하기 이전에 일부를 휴지에 작은 글씨로 옮겨 적었습니다. 이를 접고 접어 종이노끈을 만들었고, 형무소로부터 차출하는 의복 갈피에 삽입, 간수의 감시를 피해 형무소 밖으로 유출한 것이 상해까지 전달 되었습니다. 이런 지난한 과정을 거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 1919년 11월 4일의 기사 부록에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라는 제목으로 발표, 보도되었습니다.

출옥 후에도 한용운은 신간회를 결성해 치열하리만큼 일제의 침략에 맞섰습니다. 또 합병징병과 일제의 황민화 정책에 반대하며 군국주의를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스스로 고난의 칼날 위로 올라가 맨몸으로 불의와 싸웠고요.

이처럼 만해 한용운은 서리 밭 같던 시대에 대한독립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쳤지만 안타깝게도 광복 1년 전인 1944년, 끝내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출처 : 만해기념관)독립서체 한용운, 한용운체, 한용운서체, 무료폰트, 한글폰트, GS칼텍스독립서체 한용운서체 받기 윈도우용 GS칼텍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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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 속에서도 나라를 사랑했던,
죽음 앞에서도 민족을 사랑했던 매헌 윤봉길

고향에 계신 부모 형제 동포여! 더 살고 싶은 것이 인정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택해야 할 오직 한 번의 가장 좋은 기회를 포착했습니다.
백 년을 살기보다 조국의 영광을 지키는 이 기회를 택했습니다.
안녕히, 안녕히들 계십시오.

– 윤봉길 유서 중 동포에게 보내는 글-

1932년 4월 29일, 도시락 폭탄 거사가 진행되던 날 윤봉길은 25살의 청년이었습니다. 윤봉길은 김구 선생과 함께 김해산 집에서 마지막 식사를 마쳤는데요. 담담하게 고깃국을 먹는 윤봉길의 모습은 마치 농부가 일하러 나가기 전 배를 든든히 불리고자 식사하는 것 같았다고 전해집니다.

윤봉길은 식사를 마친 후 자신의 시계와 김구의 시계를 바꾸자고 청했다고 하는데요. “제 시계는 어제 선서식 이후 선생님 말씀에 따라 6원을 주고 구입한 것인데, 선생님 시계는 불과 2원짜리입니다. 하지만 제 시계는 이제 1시간 지나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이윽고 차에 오르는 윤봉길을 향해 김구는 목멘 소리로 “훗날 지하에서 만납시다”라며 마지막 인사를 전했습니다. 후일 김구는 백범일지에 윤봉길을 ‘천하영웅 떠나가다’라고 기록합니다.

독립서체 캠페인, 윤봉길체,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의거홍커우 공원에는 일본군과 초청자 등 3만 명이 넘는 군중들이 모여 있었는데요. 도시락 폭탄과 수통 폭탄을 들고 간 윤봉길은 단상 뒤쪽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기미가요 합창이 끝날 무렵, 윤봉길은 단상 위로 폭탄을 투척했습니다. 이로 인해 일본의 상하이 파견군 총사령관인 시라카와 대장과, 상하이 일본거류민단장인 가와바다가 처단됐죠.

폭탄이 터지는 것을 본 일본 군중들은 윤봉길을 구타하기 시작했고, 피투성이가 된 그를 호위병과 헌병들이 체포했습니다. 윤봉길의 폭탄 투척 사건은 한국과 중국, 일본, 미국, 유럽 등 세계 각국의 주요 신문에 보도됐는데요. 이는 일제의 강점 하에 있는 한국 민족들이 독립을 갈망하고 있다는 사실이 전세계에 알려진 것입니다.

윤봉길의 상하이 의거는 한민족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워줬으며, 독립사상을 크게 고취시켜 독립에 대한 민족적 확신을 안겨줬습니다. 또한 일제의 발호로 독립운동에 대한 전망이 불투명해지면서 침체의 늪에 빠져있던 국내외 독립운동가들에게 광복에 대한 확고한 자신감을 갖게 하여 새로운 활로를 열어준 셈이기도 했고요. 결국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대한독립운동에 대단히 중요한 방점을 찍은 것이죠.

(출처 : 매헌윤봉길의사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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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S칼텍스의 ‘독립서체’ 캠페인. 독립운동가들을 기리는 이 캠페인을 통해 사람들 마음속에 대한독립을 위해 힘썼던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이 다시 한 번 되새겨지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