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 밑의 경제학 송유관, 사람과 천연가스 그리고 석유도 실어 나른다

땅 밑 즉 지하(地下)의 수송 효율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이다. 대표적인 수송 수단인 지하철이 그렇다. 가장 이상적인 노선을 정해 레일을 깔고 달리기만 하면 된다. 정체가 없으니 러시아워(rush hour)가 없고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출발과 도착이 정해진 시간에서 벗어날 리 없다. 사람을 실어 나르는 지하철처럼 에너지를 수송하는 파이프라인도 땅 밑에 매설되어 있다. 도시가스는 LNG 인수 기지에서 출발해 땅속 주배관망을 거쳐 전국 가가호호에 취사 난방 에너지로 공급된다. 석유제품을 실어 나르는 송유관도 땅 밑을 흐르고 있다. 전국 4개 정유사에서 생산된 석유제품은 송유관을 통해 전국 주요 석유 소비지로 공급되고 있다. 지하철과 도시가스 배관, 송유관은 땅밑에서 얽히고설키며 가장 안정적이고 경제적으로 사람과 에너지를 실어 나르는 수단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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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인 정유사, 동맥인 송유관이 전국 연결

인체의 동맥을 떠올리면 송유관을 이해하기가 쉽다. 동맥(動脈)은 심장의 펌핑 활동을 통해 혈액을 온몸으로 쏘아 주는 역할을 한다. 동맥이 고장 나면 혈액 순환이 멈추게 되니 인체의 가장 중요한 장기인 것이 분명하다. 석유에너지 산업에서 정유사는 심장과 같다. 원유를 투입해 우리가 실생활에서 사용할 수 있는 석유 완제품을 생산하고 공급하는 출발지이기 때문이다.

정유사에서 생산된 석유제품은 동맥에 해당하는 송유관을 통해 전국 각지로 수송된다. 작동 방식도 심장과 유사하다. 펌프 역할을 하는 심장은 근육의 수축과 이완 작용을 통해 온몸으로 혈액을 순환시킨다. 송유 역시 파이프라인에 거대한 압력을 가해 석유제품을 밀어내면서 소비지로 내보낸다. 송유관 직경은 12~ 24인치(inch). 30센티미터에서 최대 60센티미터의 땅 밑 파이프라인에 실린 석유는 펌핑 작동을 거쳐 수송된다. 송유관으로 하루에 실어 나를 수 있는 물량이 30만 배럴에 달한다. 중동이나 북미 산유국 등에서 출발한 초대형 유조선 VLCC(Very Large Crude-Oil Carrier)이 한 달 여 동안의 항해를 거쳐 실어 나를 수 있는 물량을 송유관은 하루 만에 처리할 수 있다.

서울-부산 2.4배 길이 송유관으로 연결

4개 정유사를 출발하는 송유관은 1,081km에 달하는 길이로 전국을 연결하고 있다. 도로원표를 기준으로 서울과 부산간 거리가 456km이니 전국 송유관 길이가 약 2.4배에 달한다.
석유 대동맥답게 영호남과 충청 해안 끝자락에서 국토 중심을 관통해 수도권으로 연결되는 경로로 이어져 있다. 영남권은 울산과 온산에 위치한 SK에너지와 S-OIL 정제 공장에서 출발한다. 호남은 여수에 둥지를 틀고 있는 GS칼텍스에서 송유관이 비롯된다. 영호남에서 출발한 송유관은 대전에서 합류되고 수도권으로 이어진다. 그 과정에서 대구, 왜관, 광주, 전주 같은 주요 거점 저유소를 거치며 석유를 배분한다. 정제 설비가 대산에 위치한 현대오일뱅크의 송유관은 충청권 석유 물류를 책임지며 천안에서 주 배관망에 합류해 수도권으로 이어진다. 심장에서 출발한 혈액이 머리와 손, 발 등 몸 구석구석에 공급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송유 주 배관망은 하나이지만 정유사 생산 제품은 서로 섞이지 않고 각자의 고유 품질을 유지하며 이송된다. 계획된 이송 스케줄에 따라 각 정유사 생산 제품이 연속적으로 송유되는데 그 중간에 커팅 포인트(Cutting Point)를 정해 서로 섞일 가능성이 있는 석유제품은 빼내어 정유공장에 보내어져 재가공된다.

유조 화물 열차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석유를 수송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유조 화물열차는 석유 수송 방식 중 하나이다. 수십 량의 저장 탱크를 연결해 움직이는 화물열차는 오랜 세월 동안 내륙 저유소나 군부대 등에서 소비되는 석유제품을 전달하는 데 활용되어 왔다. 송유관처럼 정해진 노선을 안정적으로 대량 수송할 수 있고 항공유나 벙커-C 유 등 다양한 유종을 실어 나를 수 있다는 점이 돋보였다는 평가인데 이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화물 열차 노선이 사라지고 경제성이 하락하면서 정유사들은 유조 화물 열차 이용을 크게 줄이거나 포기하는 추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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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조차도 중요한 수송 수단 중 하나이다. 주로 근거리 수송에 이용되고 수송 지역에 제한이 없다는 점이 가장 큰 강점이다. 수송 구간이 정해진 송유관이나 유조 화차를 이어 최종 소비지에 석유제품을 공급하는 것은 유조차의 몫이다. 유조차는 인체의 모든 구석구석에 존재하는 모세혈관 같은 역할을 하는 셈이다.

에너지 수급 안보에도 기여

만약 송유관이 없다면… 모든 석유제품은 화물열차나 유조차로 수송할 수밖에 없다. 이때 수송 비용은 껑충 오르게 된다. 우리나라의 유일한 송유관 운영 기업인 대한송유관공사에 따르면 국내 석유 소비량의 58% 이상이 송유관을 통해 운송되고 있다. 유조차 등으로 운송되는 비용 대비 한 해 450여 억원의 직접 물류비와 320여 억원의 간접 물류비 등 약 800억원 가까운 비용이 절감된다는 것이 송유관공사의 설명이다.

송유관은 석유 수급 안보에도 결정적인 기여를 하고 있다. 폭우나 폭설, 태풍 같은 기상 재해로 땅 위 수송 요건이 제약을 받게 되면 석유를 실어 나르는 혈관이 막히게 된다. 혈액과 산소가 공급되지 않게 되면서 국가와 사회 동력은 상실된다. 하지만 송유관은 기상 조건과 무관하게 또한 시간, 교통 환경 영향을 받지 않고 석유를 안정적으로 실어 나르는 유일한 수단이라는 점에서 국가 에너지 안보의 열쇠를 쥐고 있다.

송유관공사가 보유하고 있는 전국 6개 저유소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송유관을 통해 흘러가는 석유제품을 합하면 평균 410만 배럴에 달한다는 분석이다. 국내 경질유 소비량의 6일분에 해당하는 물량이 송유관공사의 저유소와 수송 관로에 상시로 담겨 있으니 만약에 닥칠 수도 있는 수급 비상에도 대처할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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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석유 거래에서도 송유관 장점 돋보여

국제 석유 거래에서도 송유관의 효율은 돋보인다. 국가 간 거래에는 주로 유조선이 이용된다. 원유 전량을 수입에 의존하는 우리나라는 특히 중동산 원유 의존도가 높다.

사우디 등에서 원유를 선적한 초대형 유조선인 VLCC(Very Large Crude-Oil Carrier)의 대부분은 말라카 해협을 경유해 우리나라의 각 정유공장에 도착한다. 말레이시아 반도와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 사이의 말라카 해협은 중동산 원유의 50%가 통과하는 요충지로 알려져 있다. 동서 교역의 최단 항로로 해상 수송 경제성이 높기 때문인데 그 대가로 해적을 맞닥뜨리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국제해사국(IMB)에 따르면 2017년 전 세계에서 발생한 해적 공격 건수는 180건에 달하는데 이중 절반이 넘는 95건이 말라카해협 등 동남아 인근에서 일어났다.

이런 대목에서도 송유관의 효율적이고 안정적인 수송 이점은 더욱 돋보인다. 세계 최대 원유 소비국인 중국은 송유관을 연결해 러시아산 원유를 값싸고 안정적으로 공급받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극단적 폐쇄 국가인 북한에도 송유관이 깔려 있다는 점이다. 북한의 혈맹인 중국은 다칭 유전에서 생산되는 원유 일부를 북한에 공급하고 있는데 송유관이 활용된다.

북한 교류 협력에도 송유관 기여 기회 열려 있어

핵개발 포기를 전제로 북한이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시도하면서 에너지 분야에서 활발하게 논의되는 이슈 중 하나가 러시아 PNG 사업이다. PNG(Pipeline Natural Gas)는 송유관처럼 파이프라인을 통해 천연가스를 수송하는 방식이다. 세계 최대 에너지 자원 생산국 중 하나인 러시아는 파이프라인을 구축해 유럽에 천연가스를 수출하고 있다. PNG가 각광받는 것은 천연가스를 고밀도로 액화시켜 수송선으로 실어 나르는 방식 보다 경제적이고 안정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러시아 천연가스를 PNG로 공급받는 방식을 고민해 왔는데 파이프라인이 북한을 경유할 수밖에 없는 한계에 막혀 진척을 보지 못했다. 국제사회 제재를 받는 북한에 파이프라인을 건설해 천연가스 통행료를 지불하는 등의 경제 활동이 현재로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북한이 핵무기를 내세운 무력 대결을 포기하는 대신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로부터 경제 개방을 보장받게 되면 봉함됐던 러시아 PNG 사업의 맥박을 되살릴 수도 있다.

같은 맥락에서 북한을 경유하는 송유관 건설도 검토될 수 있다. 문제는 송유관 건설 비용을 상쇄하고 남을 정도로 러시아나 중국에서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원유 물량이 보장될 수 있느냐는 점이다. 세계 최대 석유 소비국인 중국의 원유 수출 여력이 극히 제한적이기 때문에 중국을 경유해 우리나라까지 공급될 원유 물량 확보가 쉽지 않다. 다만 파이프라인을 통한 석유 수송의 매력은 언제든 유효하다는 점에서 송유관 카드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런 측면에서 포항과 서울을 잇는 한국종단송유관이 건설된 1970년 이후 50년 가까이 송유관을 건설하고 운영하고 관리해온 노하우는 북한과의 교류, 북방 에너지 협력에서도 빛을 발할 기회가 살아 있는 셈이다.


industrial writer GS칼텍스 에너지, 에너지칼럼
지앤이타임즈 김신 발행인

전북대학교에서 독어독문학을 전공했다. 하지만 전공과는 상관없는 에너지 분야 전문 언론에서 20년 넘는 세월을 몸담고 있는 에너지 분야 전문 기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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