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잉 생산 우려로 급락했던 글로벌 천연가스 가격이 오름세를 이어가고 있다. 신재생에너지 비중이 높은 유럽에서 흐리고 바람이 불지 않는 날이 이어지면서 ‘대체 에너지원’인 가스 수요가 늘었기 때문이다. 지난달 유럽 가스 가격은 연중 최고치를 경신했다.
신재생에너지의 간헐성 문제가 계속되면서 전기 가격의 변동성도 극심해졌다. 이런 가운데 기저 전원으로 가스 화력 발전 외에도 원자력 발전을 시급히 확장해야 한다는 주장에 더욱 힘이 실리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녹색 정전 강타한 유럽…전기료, 가스값 동반 폭등
최근 영국 런던ICE선물거래소에서 유럽 천연가스 벤치마크인 TTF 1월물 가격은 메가와트시(MWh)당 41유로 정도에서 거래됐다. 지난달에 올해 들어 최고가인 48.720유로를 찍은 뒤 다시 안정화되긴 했지만, 계속 40유로 이상에서 가격이 형성되고 있다.
겨울철 한파를 앞두고 난방용 에너지 사용량이 급증한 데다 신재생에너지의 간헐성 문제가 불거져 가스 가격을 밀어 올렸다. 기상 조건에 따라 전력 생산이 오락가락하는 간헐성은 신재생에너지의 고질적 문제로 꼽힌다. 특히 지난달 유럽에서는 ‘어둡고 바람이 멈춘 상태’라는 의미의 둥켈플라우테(Dunkelflaute)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풍속이 급격히 떨어져 풍력 터빈에서 전력 생산이 거의 이뤄지지 않고, 하늘이 흐려 태양광 패널도 제 기능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녹색 정전’으로도 불린다. 녹색 정전 사태는 유럽에서 신재생에너지 설비를 대폭 늘린 뒤 매년 반복되고 있다. 이달 들어 약 2주간 영국과 독일, 북유럽 일부 국가를 연이어 강타했다.
이 기간 신재생에너지 발전량을 메우기 위해 석탄과 천연가스 등 화석연료 발전량이 급증했다. 독일 아고라 에네르기벤데에 따르면 통상 40~50%이던 독일 신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이 지난달 6일 19.5%로 쪼그라들었다. 당일 육상풍력의 일일 발전량이 0.14GWh(기가와트시)로 사실상 전무했기 때문이었다.
해상풍력과 태양광 발전량도 각각 6.82GWh, 42.64GWh로 연중 최저치를 보였다. 신재생에너지에서 모자란 전기를 대신하기 위해 경질 석탄과 갈탄, 천연가스 등 화석연료 사용량을 대폭 늘렸다. 독일 프라운호퍼ISE에 따르면 이달 4일부터 10일 사이 신재생에너지는 전기 생산의 30%를 차지했으며, 나머지 70%는 전부 화석연료 에너지였다.
독일 유틸리티 업계에서는 “기저 전원 확충을 서둘러야 한다”는 경각심이 제기되고 있다. 독일 최대 유틸리티 기업 RWE의 마르쿠스 크레버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자신의 링크드인 계정에 “이달 초 독일의 전력 공급이 한계에 도달했다”며 “지난 6일 저녁 시간대에 전기요금이 ㎿h당 800유로를 넘어섰고, 이는 평소보다 약 열 배 비싼 가격이었다”는 글을 올렸다.
그는 “다시 안정화되긴 했지만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둥켈플라우테에 대응하고 전력 수급 시스템 및 가격 안정성을 보장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또 “(화석연료 등 기존 발전원의) 발전 용량을 축소하면서도 신재생에너지에 ‘백업 에너지’를 제공하지 않으면 어떤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지 유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백업 에너지란 신재생에너지의 간헐성을 보완하기 위해 배터리와 양수발전 등 에너지저장장치(ESS)를 확충하고, 전력 수입을 포함한 대체 공급원을 충분히 확보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재생에너지 시스템이 무너졌을 때 가스와 석탄, 장작으로 전력을 공급하는 체계가 한계에 이르렀다는 점에서다.
탄력 받는 원전 르네상스…”독일은 원전 인정하라”
유럽에서는 신재생에너지의 간헐성 문제가 부각되자 다시 원전에 대한 선호가 커지고 있다. 하비에르 블라스 블룸버그 에너지·원자재 전문 칼럼니스트는 9일 X(옛 트위터)에서 둥켈플라우테 문제를 지적하며 “메스메르가 고마울 따름”이라고 적었다. 1972~1974년 프랑스 총리를 지내며 프랑스를 원자력발전 강국으로 키운 피에르 메스메르를 지칭한 것이다.
‘녹색 정전 사태의 친환경적 해결책은 원자력뿐’이라는 공감대가 퍼지면서 유럽 국가는 잇달아 원전 복귀 및 확대를 선언하고 있다. 스웨덴(1980년 탈원전), 이탈리아(1987년), 스위스(2017년) 등 과거 탈원전을 결정한 국가는 원전 건설에 나서고 있다. 체코를 비롯해 프랑스 영국 폴란드 네덜란드 핀란드 루마니아 슬로베니아 등도 신규 원전 건설을 추진 중이다.
이와 관련해 스웨덴 정부는 최근 독일 정부의 ‘탈(脫)원전 고집’에 일침을 가했다. 독일 정부가 원전을 부정하는 정책 기조를 바꾸고 전력 시장을 개편하지 않으면 스웨덴의 전기를 수출하는 프로젝트를 승인하지 않겠다는 엄포를 놨다. 에바 부시 스웨덴 에너지부 장관은 파이낸셜타임스(FT)에 “독일과 스웨덴 남부의 전력망을 연결하는 한사 파워브리지 프로젝트를 보류하겠다”고 말했다.
한사 파워브리지는 독일과 스웨덴이 700메가와트(MW)가량의 전기를 거래하기 위해 양국의 전력망을 연결하는 프로젝트다. 그는 “해당 프로젝트는 독일이 전력 시장을 개편해 해외에서 값싼 전기를 과도하게 수입하는 것을 멈춰야만 승인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독일이 자국 전력 시장을 입찰 구역으로 나눠 전기 네트워크의 효율성을 높이고 가격을 낮춘다면 스웨덴 정부는 이 프로젝트를 추진할 준비가 돼 있다”고 덧붙였다.
부시 장관은 특히 독일의 탈원전 정책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그는 “독일의 전력 가격이 높은 원인은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독일이 원전 폐쇄를 결정하고 유럽연합(EU) 차원의 원자력발전 지원을 반대한 데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유럽이 원자력 발전을 둘러싼 정치적 논쟁을 멈추고 시스템을 안정화하기 위해 기술 투자를 장려해야 한다”고 했다.
스웨덴 정부가 독일 정부에 칼을 빼든 것은 자국의 날뛰는 전력 가격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독일이 스웨덴의 북부 수력발전 전력 등 저렴한 전력을 계속 대규모로 끌어가면 스웨덴 내 전기 가격의 지역 간 격차가 더 심화할 것이란 우려에서다. 스웨덴은 북부에 대부분의 수력 발전소가 있지만 송전망이 열악해 전기료가 지역별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지난주 볼보 자동차 본사 등이 있는 남부 최대 도시 예테보리에서는 전기 소비자들이 북부 도시 룰레오의 190배에 달하는 전력 요금을 내야 했다. 특히 지난달 거셌던 둥켈플라우테 현상이 이달 들어 다시 나타나면서 그 여파로 인해 유럽 각국의 전기료의 변동성이 더욱 극심해졌다고 블룸버그 통신 등은 지적했다.
이런 가운데 글로벌 가스 가격은 계속 오름세를 보일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세계 최대 경제국인 미국에서 올해 천연가스가 석탄을 제치고 1위 발전원으로 올라섰다는 점에서다. 지난해 말 미국의 전력 구성에서 석탄 비중은 15.8%로 떨어졌고 대부분 저렴한 천연가스로 대체됐다. 가스는 전년 대비 6.5%포인트 증가한 43%의 점유율을 기록했다.
글 – 김리안 한국경제 기자
※ 본 콘텐츠는 한국경제 김리안 기자의 기고를 받아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