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가 허락한 시간에만 길이 열리는 섬, 전라남도 여수의 장도(長島).
이 특별한 공간에서 예술가들은 자연의 호흡에 귀 기울이며 작품을 완성하고, 그 시간을 예술의 언어로 기록합니다.
GS칼텍스 예울마루 창작스튜디오는 2020년 여수 장도에 문을 연 이후, 예술가들에게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창작할 수 있는 작업 공간을 제공하며 ‘예술의 섬’으로 불릴 만큼 독립적이고 실험적인 예술 생태계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작가들은 하루에 두 번 물이 드나드는 진섬다리, 바다를 마주한 작업실 등 장도 특유의 환경과 체류 경험을 각자의 시선으로 해석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작품을 선보입니다.
이러한 창작의 흐름은 예울마루가 지난 10여 년간 쌓아온 문화예술 활동과 맞닿아, 지금까지 1,900회 이상의 공연과 180회 이상의 전시를 통해 약 140만 명의 관객에게 예술을 경험할 기회를 제공해왔습니다.
그리고 그 예술적 흐름은 이번 전시〈시간과 공간 너머>로 이어지고 있는데요. GS칼텍스 예울마루 창작스튜디오에 입주한 작가 9팀이 여수 장도의 자연과 체류 경험을 예술적 언어로 풀어낸 작품들을 서울 금호미술관에서 선보이고 있습니다. 10월 16일부터 11월 9월까지 진행하는 이번 전시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기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이번 글은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미술 인플루언서로 주목받는 MBC 김지은 아나운서가 직접 장도를 찾아, 그곳의 공기와 물결, 예술의 흔적을 몸소 경험한 뒤 전시장에서 다시 마주한 감상을 담았습니다.
김지은 작가의 시선을 따라, 장도의 풍경과 예술이 어떻게 시간과 공간을 넘어 이어지는지 함께 살펴보시죠.
입소문처럼 빠르고 무서운 게 있을까. 전라남도 여수의 ‘장도(長島)’에 대한 작가 발(發) 소문부터 들어보자. 10개월 동안 머물렀던 창작스튜디오를 떠나야 하는 것이 너무 아쉬워, 재지원을 위해 개명(改名)이라도 해야 하는 게 아닐까 고민했다는 이야기다. 참고로 이 작가는 칭찬에 인색하기로 유명하다. 도대체 어떤 곳이길래. 이번엔 ‘맘카페’에서 활동하는 친구의 불평이 들려왔다. 아이들이 거대한 피자 모양의 헝겊 위에 각자의 토핑을 올려 완성하는 전시 〈냠냠〉을 온 가족이 함께 보러 가고 싶었지만, 장소가 너무 멀리 떨어진 ‘장도’라는 것이다. 셔틀이라도 운영하거나, 서울이나 타 지역으로 순회전을 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투덜거렸다. 보통 블록버스터 전시는 서울에서 시작해 지역으로 내려가는데, 이번엔 반대였다. 까다로운 친구의 마음을 움직인 전시가 자주 열리는 곳이라니, 나도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클래식 애호가 발(發) 소문도 있었다. 선우예권과 임윤찬이 모두 ‘예울마루’ 신년음악회에 선 뒤 반 클라이번 국제콩쿠르에서 우승했다는 것이다. 연주자의 공연 일정을 기준으로 한 해의 스케줄을 짜는 이 열성적인 애호가는, 단 20초 만에 매진된 조성진 피아노 리사이틀 티켓을 구했다며 콧노래를 불렀다. 최고의 연주를 감상한 뒤 예울마루에서 내려오며 바라보는 ‘여수 밤바다’가 최고라고 했다. 얼마 전에는 락에 빠진 20대 후배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데이브레이크, 루시, 애노드의 합동 공연, 진짜 무대를 찢었어요. 매년 장도를 찾으려고요!”
소문은 진실이 신발을 신기도 전에 지구 한 바퀴를 돈다고 했던가. 진실을 직접 확인하고 싶어졌다. 예술가들의 입에서, 관객들의 입에서, 어느새 신화처럼 부푼 장도로 향했다. 하지만 이 여행의 시간표는 내 것이 아니었다. 장도로 들어가는 길은 하루 두 번, 바다가 허락할 때만 열린다. 그러니 기차표는 내 일정이 아니라 물때(潮時)의 시간에 맞춰야 했다. 물때표에 따르면 10월 10일 오전 9시 18분부터 길이 잠겨, 오후 1시 14분에야 진입이 가능했다. 언뜻 보면 변덕스러운 자연의 리듬 같았던 ‘물때’가, 사실은 놀라울 만큼 정교하게 계산된 주기의 질서라는 사실이 신기했다.
여유 있게 도착한 망마산 전망대에서 선소 유적지를 지나 예울마루로 향하는 길, 전시장과 공연장, 분수광장을 거쳐 장도까지 이어지는 유려한 흐름은 마치 산에서 계곡이 흘러 바다에 이르듯 자연스러웠다. 예울마루를 설계한 건축가 도미니크 페로 역시, 인간의 시계가 아닌 자연의 리듬을 읽어낸 것이리라.
드디어 오후 1시 14분, 진섬다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진섬’은 ‘긴 섬’이라는 뜻의 전라도 사투리다. 마음이 급한 주민들과 관광객들은 바지를 무릎까지 걷어 올리고 첨벙거리며 건너기 시작했다. 예상보다 많은 인파와 긴 행렬에 놀랐다.

GS칼텍스가 2009년 예울마루 조성을 위한 첫 삽을 뜬 지 16년 만에 147만 명이 예울마루를 찾았고, 211만 명이 물때를 기다려 장도를 건넜다고 한다. 여수의 인구 27만명을 훌쩍 뛰어넘는 숫자다. 불과 십여 년 전만 해도 사람의 발길이 드물던 작은 섬이, 지금은 여수 사람들이 주말마다 찾는 산책길이자 멀리서 온 여행자들의 필수 코스가 된 것이다.
예술은 사람을 부르고, 사람은 다시 예술을 살린다. 앞을 바라보니 사람들의 절반은 다도해 정원 쪽으로, 나머지는 우물 쉼터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전망대로 향하던 이들은 창작스튜디오의 넓은 창가 앞에 멈춰 서서 안을 들여다본다. 작가들과 가볍게 인사를 나누거나, 작품이 얼마나 진전되었는지 묻기도 한다. 원주민이 살던 다섯 채의 집이 스튜디오로 탈바꿈한 뒤 자연스럽게 생겨난 풍경이다. ‘배에는 여자를 태우지 않는다’는 금기를 깨고 여성 작가들을 섬 사이로 태워주는 선장님이 생겼고, 무거운 재료를 함께 나르거나 퍼포먼스에 직접 참여하는 주민들도 늘어났다. 매년 3일 동안 열리는 스튜디오 개방일에는 작가, 주민, 방문객이 구분 없이 어울린다고 한다. 이론 속 문장이었던 ‘일상 속 예술, 예술 속 일상’이 현실로 펼쳐지는 순간이다.
고립이 아니라, 세상과의 연결을 위해 시끌벅적했던 장도는 물길이 닫히는 밤 열 시부터 새벽 여섯 시까지, 광활한 대자연과 예술가의 고독이 마주 서는 무대로 변한다. 인간의 소리가 잦아들면, 비로소 자연의 소리가 들려온다. 언어로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정교하고 거대한 소리다. 처음 장도에 들어선 작가들은 그 낯선 합창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밤이 깊어질수록 자연은 점점 가까워진다. 파도와 함께 출렁이던 몸의 진동, 온도와 바람, 냄새와 소리, 바다 위로 솟았다가 다시 잠드는 태양의 빛까지. 그 모든 것이 피부 아래로 스며들어 작가들의 몸에 저장된다. 이 섬에서의 시간은 예술가들에게 무엇을 남겼을까. 밀물과 썰물처럼, 세상과 고독이 오간 흔적을 그들의 작업에서도 찾을 수 있을까. 마침 장도 창작스튜디오 1기에서 3기까지의 입주 작가들의 작품이 서울에서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인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장도를 건널 때의 설렘 그대로, 금호미술관으로 향했다.

<시간과 공간 너머로>전에서 제일 먼저 만난 것은 강운의 <파랑 (Blue)>이었다. 매일 다른 하늘 아래, 그는 여수의 섬 이름을 하나씩 불러가며 그렸다. 고요한 파랑이 먼저 보이더니 이내 격렬한 파랑이, 우울한 파랑이, 명랑한 파랑이… 무수한 파랑이 마음 속에 번졌다. 그 푸른 결 사이로 아름답기만 한 육지 사람의 바다와 희망이자 공포가 겹쳐지는 섬사람의 바다가 교차했다. 무수한 파랑 뒤에 무수한 인생이 스쳐지나간다. 맞은편에는 <다섯 겹의 감정, 한 송이 수국처럼> 시리즈가 걸려있다. 제목을 보지 못했더라면 영원히 수수께끼로 남을 작품이었다. 수국은 흙의 산도에 따라 꽃 색깔이 달라진다. 정작 장도에서는 만나지 못한 여름 수국을 그는 아쉬움이라는 감정의 토양 위에 피워냈다.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장도가 그의 마음 속에 남겨둔 여름의 색이다.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마법 같은 색의 향연 앞에 설치된 하얀 덩어리들. 하나는 사람 심장을 닮았고 또 하나는 석총을 닮았다. 정현 작가의 <무제>는 두 점은 모두 장도에서 발견된 돌덩어리를 스티로폼으로 캐스팅한 작품이다. 이 마지막 순간의 개입 외에 작가는 재료가 고유존재로서 살아내려고 견딘 ‘덩어리진 시간’을 발견하는 행위자로 남는다. 그리거나 만들지 않고 매일 진섬다리를 오가는 작가가 대체 무슨 작업을 하는 걸까 궁금해하던 동료 작가들과 전시관계자들은 나중에서야 그가 매일 장도의 작은 돌들을 모아 번호를 매기고 모양을 관찰하고 숨겨진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 것을 알았다고 한다. 장도의 파도와 시간이 조각해 낸 거대한 서사 앞에서 모두가 숨을 죽였다고.

예울마루 창작스튜디오 2기의 4번 방은 가장 늦게까지 불이 꺼지지 않는 방으로 유명했다. 미술계의 깊은 존경을 받는 원로 오원배 작가의 작업실이었다. 창작을 부식시키는 일상화된 공간을 벗어나 새로운 공간에서 작업하며 다시 인간과 주변 환경을 들여다보길 선호해온 그가 장도에서 밤낮으로 드로잉한 것은 뜻밖에도 테트라포드였다. 방파제의 침식을 막기 위해 설치되는 다리 네 개 달린 콘크리트 블록 (네발 방파석) 말이다. 인간과 자연의 힘에 맞서 세운 이 인공 구조물은 그가 오랫동안 탐구해온 인체의 근접 부감(俯瞰) 구도와 닮아있다. 인간은 있으되, 언제나 소외가 먼저 보였던 작품 세계처럼. 테트라포드만을 그렸으나 강풍과 높은 파도가 배경처럼 솟구쳤고 왜소한 인간의 모습도 희미하게 어른거린다.

한층 더 내려가니 반가운 장도 영상이 상영되고 있었다. 1기 입주 작가들로 창작스튜디오의 역사를 함께 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예술인연합 AAA는 장도에 살던 옛 주민들에게서 수집한 사진 자료와 기억을 바탕으로 지금은 사라진 장도의 옛집들-실제 장도 190-2번지에서 190-6번지에 존재했던 다섯 채의 집들-을 복원했다. 장도를 가장 오래 목격했을 진섬다리 한가운데 설치된 바 있는 이 영상을 보고 나면 저절로 장도의 호흡으로 걸음을 옮기게 된다.
<열쇠 없는 방>과 <심심한 섬>의 이지연&성정원 작가의 언급처럼 ‘조용하고 소란하며, 긴장되면서 궁금하게 만드는’ 장도에서 작가들은 놓쳤던 감각들을 섬세하게 되찾기도 하고 김채린 작가의 <하나인 27가지 목소리>처럼 장도는 청각까지 아우르는 복합적인 감각으로 전환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장도는 정유미 작가의 <구름파도와 마주 앉아보렴>처럼 인간 내면의 가장 근원적인 풍경을 호출해내기도 하고 김방주 작가의 <사물의 기억>처럼 조류에 떠내려온 부표 등 바다가 토해 놓은 풍경 속을 머뭇거리며 거닐도록 한다. 한편 시시각각 변하는 바다의 물결과 색, 압도적인 밤의 어둠을 끊임없이 보여주는 장도는 사윤택 작가에게 회화의 본질을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에 대한 커다란 도전으로 다가왔다. 작가의 표현처럼 하나의 ‘사태’에 봉착한 그가 <기억되는 순간>으로 남긴 저항은 흥미롭게도 고대 암벽화를 연상시키는 원시적 회화였다.

금호미술관의 <시간과 공간 너머로> 전시를 돌아보며 고립된 섬에서 예술의 섬으로 거듭난 장도를 다시 한번 떠올린다. 하루에 단 두 번, 바다가 길을 열어주는 섬. 세상과의 극단적인 단절과 연결을 반복하는 그 낯선 리듬 속에서 작가들은 각자의 고유한 언어로 응답해 냈다. 장도는 이제 더 이상 지리적 장소가 아니라 작가들의 내면에 끊임없이 떠오르는 상징적 공간으로 남을 것이다. 섬과 작가가 함께 써 내려간 서사를 지역 주민들은 물론이고 시간과 공간을 넘어 더 많은 관객들과 호흡할 수 있는 전시로 마무리해 낸 의미 있는 행보에 박수를 보낸다. 오랜 세월, 묵묵히 조성한 이 의미 깊은 예술 생태계에서 어떤 작품들이 태어날지 기대하며 전시장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