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은 숨기고 ‘남’은 드러내는 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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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로는 용제라고 부르는 Solvent는 ‘loosen(느슨하게 하다, 풀다)’이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느슨하게 만든다는 뜻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뭔가를 녹이고 그 안에 부드럽게 풀어내는 기능을 가진 화학적 화합물의 종류를 뜻하는 말입니다. 물도 다양한 물질을 녹일 수 있기 때문에 용제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용제의 개념은 산업이나 공업에서 유용하게 사용되는 것들을 위주로 합니다. 물질을 잘 섞어주고 녹이는 용제의 성질 덕분에 수많은 물질이 용제로 인해 자신의 쓰임새를 100% 뽐낼 수 있습니다. 다양한 물질을 녹이는 만큼 용제의 종류 역시 다양한데요. 용제가 우리 삶 속에서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지 함께 알아보겠습니다.
물질을 용해할 수 있는 액체, 용제
산업이나 공업에서 사용하는 ‘용제’는 물에 잘 녹지 않는 유지나 수지를 녹여 균일한 용액으로 만드는 물질을 의미합니다. 일반적으로 용제는 액체 형태로, 녹인 물질을 화학적으로 바꾸지 않으면서 물질을 잘 드러내는 특성을 가졌습니다. 용제는 크게 유기용제와 무기용제로 나눌 수 있는데, 기름이나 지방과 같이 탄소를 기반으로 한 화합물인 경우 유기용제, 그렇지 않은 경우는 무기용제라고 합니다. 실생활에 사용하는 용제의 대부분은 유기용제이기 때문에, 이를 화학물질의 성상에 따라 다시 지방족 및 방향족 탄화수소류, 할로겐화 탄화수소류, 알코올류, 케톤류, 에테르류 등으로 분류합니다. 또 극성에 따라 극성 용제와 무극성 용제, 비점에 따라 고비점, 중비점, 저비점 용제 등으로 구별할 수도 있습니다.
용제는 드라이클리닝이나 페인트, 프린트 잉크, 향수, 모피, 농약, 제초제, 기계세척제 등 각종 산업용으로 실생활에 밀접한 쓰임새를 가지고 있습니다. 산업공정에서는 액체 탄화수소 유분이 다른 성분을 녹이거나 이송하는 용도로 주로 사용됩니다.
드라이클리닝에 사용되는 유기용제
유기용제는 기름이나 지방을 잘 녹이고 휘발성과 인화성이 강하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유기용제가 사용되는 대표적인 곳은 ‘드라이클리닝’입니다. 드라이클리닝은 물과 세탁세제 대신 유기용제와 드라이클리닝 세제를 사용해 세탁합니다. 드라이클리닝과 물빨래의 차이점은 바로 이 ‘용제’의 차이에서 나옵니다.
탄소와 수소로 이루어진 유기용제는 극성을 띠지 않는 무극성 분자이지만 산소와 수소로 이루어진 물은 극성 분자입니다. 일반적으로 극성 분자는 극성 분자끼리, 무극성 분자는 무극성 분자끼리 결합하려고 하기 때문에 두 물질은 섞이지 않습니다. 물과 기름이 잘 섞이지 않는 것처럼 말이지요. 즉, 무극성인 유기용제는 무극성 오염물질을 녹여 세탁하고, 극성 물질로 이루어진 오염물질은 물에 녹여 세탁합니다. 이 때문에 땀이나 주스와 같은 수용성 얼룩은 물빨래로, 화장품, 삼겹살 기름과 같이 지용성 물질이 함께 있는 얼룩은 드라이클리닝으로 제거할 수 있는 것입니다.
드라이클리닝은 일반적인 물세탁보다 섬유의 손상이 더 적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유기용제가 같은 부피의 물보다 더 가벼워, 섬유에 가하는 힘과 압력이 매우 작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모나 견, 실크와 같이 색과 모양이 변하기 쉬운 섬유는 드라이클리닝 세탁이 적절합니다.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은 유기용제는 피부에 묻으면 지방질을 녹여 몸에 흡수되고, 호흡기를 통해서도 쉽게 흡수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드라이클리닝 후 찾은 옷은 통풍이 잘되는 곳에 두어 남아 있을지 모르는 용제를 확실히 없애주는 것이 좋습니다.
드라이클리닝은 언제부터 했을까?
고래기름 대신 등유를 이용해 불을 밝히기 시작한 19세기, 프랑스의 염색 업자인 장 바티스트 졸리(Jean Baptiste Jolly)는 우연히 테이블에 쏟은 등유가 테이블보의 얼룩을 흡수해 테이블보를 깨끗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이후 다양한 드라이클리닝용 용제가 개발되면서 19세기 세탁업자들은 등유를 비롯해 테레핀유, 가솔린, 벤젠, 나프타, 가솔린 등을 용제로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테레핀유는 세탁 후에도 냄새가 많이 났고, 벤젠은 옷에 남아 몸에 해로운 영향을 끼쳤습니다. 게다가 이 용제 들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는데, 불이 잘 붙고 폭발하기도 쉬워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당시 유럽과 미국에서는 세탁소에서 불이 너무 자주 나자, 세탁소를 도시 내 거리에서 운영하지 못하도록 막고 도시 외곽에서 세탁한 뒤 세탁물을 들여오도록 했을 정도입니다.
1930년대, 미국의 윌리엄 조셉 스토다드(William Joseph Stoddard)가 불에 타지 않으면서도 강한 세척력을 가진 염소계 용제, 퍼클로로에틸렌(perchloroethylene, PCE)을 드라이클리닝에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석유가 부족했던 2차 세계대전 당시 석유계 용제를 대체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퍼클로로에틸렌의 유해성이 밝혀지면서 현재는 석유계 용제를 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도료 산업에서 용제는 기본
용제는 드라이클리닝을 하는 세탁 산업 외에도 도료 산업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도료는 물체의 표면에 도포하여 엷은 막을 형성, 고화하여 그 물체를 보호하고 외관을 아름답게 하는 것으로, 흔히 떠올릴 수 있는 페인트를 비롯해 공업용, 자동차용, 선박용, 철 구조물 등 다양한 종류가 있습니다. 자동차 도료를 예를 들면, 도료는 예쁜 색깔과 광택을 입혀줄 뿐만 아니라 태양의 강렬한 자외선, 산성비, 기름이나 염분, 화학약품 등 외부환경으로부터 보호하고, 부식과 오염을 막아주는 역할도 합니다.
이러한 도료를 제대로 펴 바르기 위해서는 기본 베이스가 되는 용제가 중요합니다. 도료는 안료와 수지, 첨가제, 용제 등 4가지 성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일반적으로 용제가 도료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최소 30%에서 최대 80%에 이를 정도입니다. 용제는 증발속도에 따라 도료의 평활성(평탄하고 매끄럽게 도막이 생기는 성질), 흐름성, 퍼짐 시간, 광택 등에 영향을 미칩니다.
도료로 사용되는 용제는 지방족 탄화수소, 방향족 탄화수소와 같은 비극성 용제와 분자구조에 극성기를 가진 알코올, 에스테르, 케톤 등이 있습니다. 톨루엔이나 자일렌 등으로 이루어진 방향족 탄화수소 용제는 에폭시, 비닐, 우레탄 수지의 희석제로 주로 사용합니다. 특히, GS칼텍스는 방향족 공정에서 생산되는 중질 방향족 중에서는 탄소수가 9개인 성분은 따로 분리하여 생산해 방향족 순도가 거의 100%에 가까운 제품을 생산해 공업용 페인트나 선박, 그리고 자동차 도료로도 활용되고 있습니다. 또 정유 공정에서 생산된 유분에서 황을 제거하고 정제 공정을 거쳐 페인트 용제나 희석제, 고무 제품 용제, 기계 세척제로 사용되기도 하고, 방향족 함량을 줄이면 신문지 잉크로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페인트에 ‘기능’을 추가할 수 있는 이유, 용제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 건물에는 곰팡이나 누수, 결로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페인트에 ‘특수한’ 기능을 추가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옥상에 바르는 방수 페인트입니다. 흔히 옥상에 칠하는 녹색 페인트는 탄성이 있는 우레탄 방수제가 들어가 온도 차에 의한 수축과 팽창을 견디는 역할을 하고, 세라믹 입자를 넣으면 페인트의 내마모성이 향상되기도 합니다.
어떤 수지와 도료를 넣느냐에 따라 열을 차단하는 페인트, 무거운 하중에도 잘 견디는 페인트 등 다양한 ‘고기능’성 페인트를 만들 수 있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기능을 페인트에 녹이기 위해 물을 용제로 한 것은 수성페인트, 시너를 용제로 한 것은 유성페인트로 구분합니다. 시너는 벤젠이나 자일렌, 톨루엔, 아세톤 등으로 이루어진 유기용제로, 다양한 수지와 도료를 녹여 기능성 페인트를 만드는 데 사용됩니다.
수많은 출력물을 프린트한다, 잉크 속 용제
용제가 사용되는 또 다른 곳은 바로 신문이나 잡지와 같은 인쇄물과 각종 포장재와 라벨, 옥외 간판이나 현수막에 프린트하는 잉크 속입니다. 현대 사회가 아무리 디지털화됐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길거리에서 프린트로 인쇄된 전단지를 나눠주며 홍보를 하고, 행사를 하거나 상점의 이름을 내걸 때는 어김없이 출력물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출력을 할 때 잉크의 점도가 적당하지 못해 잘 나오지 않는다거나 출력이 끝난 후 잉크가 잘 번진다면 얼마나 답답할까요? 잉크가 잘 나올 수 있도록 적당한 점도를 가지면서 프린트 후에는 즉시 증발하여 번지지 않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용도에 맞는 용제를 사용해야 합니다.
종이나 금속, 플라스틱 등 다양한 소재에 인쇄할 수 있는 오프셋 인쇄 잉크에는 석유계 용제가 약 25% 들어가며, 여러 종류의 합성수지를 함께 녹여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에스테르류와 케톤류 용제가 들어간 솔벤트 잉크는 각종 플랜카드나 현수막, 간판 등을 출력하는 솔벤트 잉크 안에 주로 들어갑니다. 대표적인 케톤류 용제 중 하나인 메틸에틸케톤(Methyl Ethyl Ketone, MEK)은 안료, 도료, 잉크 첨가제(인쇄 잉크용 용제)나 점착제, 세정제, 인조가죽 제조 중간체나 각종 고분자화합물의 용제 등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습니다. 잉크를 만드는 회사별로, 그리고 프린트를 할 대상(소재)에 따라 용제와 각종 첨가물이 각기 다른 비율로 만들어집니다.
용제를 다룰 때에는 조심 또 조심
용제는 활용성이 높아 다양한 산업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만큼 용제는 생산하거나 사용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과 접촉하고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물질입니다. 용제는 산업현장에서 각별히 신경 써서 ‘조심히’ 다뤄야 하는 물질입니다. 특히, 유기용제는 휘발성이 강해 공기 중으로 퍼져나가 호흡기나 피부를 통해 체내에 흡수될 수 있습니다. 유기용제는 물질의 종류와 독성, 노출 농도, 노출 시간 등에 따라 피부 손상, 말초신경 장해, 시력 저하, 뇌기능 장해 등 신체에 다양한 영향을 주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 때문에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은 공장에서 고농도의 용제를 사용하는 작업자는 유기용제용 방독마스크와 보안경, 안전장갑 등의 보호구를 반드시 착용하고, 유기화합물의 증기를 밀폐하거나 배기장치를 설치, 또는 다른 옥내 작업장과 격리된 곳에 환기장치를 설치할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2015년부터는 휘발성유기화합물에 대한 규제를 담은 화학물질 관리법이 시행되면서 유기용제를 더 안전하고 엄격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개선됐습니다.
자신의 성질을 잃지 않고, 또 남의 성질을 바꾸지 않으면서도 쓰임을 다하면 공기 중으로 날아가 버리는 용제. 용제의 쓰임이 이렇게나 많은 이유는 바로 자신보다 상대방을 드러내는 숨은 조력자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일상 속에서 한 번쯤 드라이클리닝을 한 옷을 만져보며, 형형색색의 페인트를 바라보며 GS칼텍스가 생산했을지 모를 용제를 찾아보면 어떨까요? 이상 <에너지 라이프> 용제 편, I am your Energy GS칼텍스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