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칼럼] 170년된 친환경 기술… 냉난방의 패러다임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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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6년 오스트리아의 한 염업 엔지니어는 염전에서 소금을 건조하는 데 필요한 나무와 석탄이 빠르게 고갈되는 문제를 고민했다. 물 증기의 잠열(물질이 액체·기체로 바뀔 때 숨겨져 드나드는 열)이 염수 증발에 활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외부의 낮은 온도 열원을 끌어다 고온의 열을 만드는 ‘열 이동(heat transfer)’ 원리를 최초로 실험에 적용했다.

170년된 친환경 기술, 히트펌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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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히트펌프 원리를 가장 먼저 구현한 시도였다. 현재 전 세계가 탄소중립을 위해 추진하는 히트펌프는 바로 이 원리를 바탕으로 한다. 히트펌프는 보일러처럼 연료를 태워 열을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열(공기·지열·수열)을 끌어와 실내 난방과 온수에 활용하는 장치다. 쉽게 말해 냉장고나 에어컨의 원리를 거꾸로 활용한다고 보면 된다.

냉매가 외부의 열을 흡수해 기체로 변하면, 이를 압축해 온도를 더 높인 뒤 실내로 열을 내보낸다. 이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다. 이때 냉매 압축에 필요한 동력이 전기면 전기히트펌프, 가스면 가스히트펌프로 분류된다. 히트펌프는 여름에는 실내의 열을 외부로 내보낼 수 있어 냉방도 가능하다. 기존 보일러 대비 효율은 보통 3배 수준까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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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설치 비용이 최소 3배 이상 든다는 점이 문제다. 설치 과정도 번거롭다. 일부 건물은 대규모 개보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전기히트펌프를 설치해 재생에너지 전기와 연계하면 탄소감축률을 높일 수 있지만, 누진제 등으로 전기료가 비싸질 경우 구동 비용이 크게 증가한다는 문제도 있다.

현 유럽 정치를 흔들다

이 때문에 히트펌프는 유럽에서 기후정책의 핵심 축이자 동시에 정치적 쟁점이 됐다. 가계의 생활비 부담 문제가 맞물리면서 난방 정책이 곧바로 표심에 영향을 주는 사안이 됐기 때문이다.

독일에서는 신규 화석연료 보일러를 금지하고 히트펌프 설치를 보조하는 제도가 발표된 뒤 정치권을 중심으로 ‘난방 망치(heating hammer)법안’이라는 공격이 쏟아졌다. 독일은 결국 정권이 교체됐고, 화석연료 보일러를 퇴출하는 속도를 늦추고 있다.

이탈리아도 히트펌프 논란이 일었다. 2020년 주세페 콘테 정부는 히트펌프나 태양광 등을 설치해 주택을 개조할 경우 비용의 최대 110%를 세액공제해주는 ‘슈퍼보너스 110%’를 도입했지만, 관련 예산이 크게 증가하자 새로 들어선 조르자 멜로니 정부가 이를 대폭 축소했다. 이후 이탈리아의 히트펌프 판매는 급감했다.

높은 비용에 진통…대안은?

폴란드에서는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석탄 가격이 급등하자 석탄 보일러의 대안 난방 수단을 찾는 수요가 급증했다. 전쟁이 일어난 그해에는 전기히트펌프 판매량이 사상 최대를 기록했고, 히트펌프 제조업체 주가가 400% 급등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수요는 일시적이었다. 지난해 판매량이 2023년보다 감소하면서 폴란드는 누적 기준 약 74만 5,000대의 히트펌프가 설치되는 데 그쳤다. 총 660만 대를 보유한 유럽 1위 프랑스에 크게 뒤처진 규모다. 원자력발전 강국인 프랑스는 전기료가 저렴하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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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트펌프 진통을 겪었던 유럽에서는 보급을 지속하려면 설비 보조금, 전기요금 체계 개선 등 정부 차원의 지원이 필수적이라는 점이 재차 강조되고 있다. 한편으로는 재생에너지 확대만을 기준으로 보급 정책을 설계하는 방식에 대한 비판도 커지고 있다.

특히 냉난방의 목적을 ‘재생에너지 전기 사용’이 아니라 ‘에너지효율 향상’에 둔다면, 전기히트펌프뿐 아니라 가스히트펌프도 장려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다. 가스히트펌프는 보일러처럼 연소열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공기열 등 외부의 열을 함께 활용하기 때문에 동일한 난방출력을 만들면서도 가스 사용량이 줄어든다.

또한 가스히트펌프는 전력을 거의 쓰지 않고도 난방을 돌릴 수 있기 때문에, 전력이 가장 많이 몰리는 겨울철 전력피크 부담을 낮추는 데 유리하다. 전기히트펌프는 난방이 집중되는 저녁 시간에 전기 수요를 크게 증가시키지만, 가스히트펌프는 가스를 연료로 압축기를 돌리므로 전력망 증설 없이 난방 수요를 흡수할 수 있다.

아울러 도시가스나 기존 보일러 사업자들에는 ‘공정한 전환’이 될 수 있다. 히트펌프로 난방 패러다임이 빠르게 바뀌는 상황에서는 시장 축소 직격탄을 피하기 어렵지만, 가스히트펌프는 기존의 도시가스 인프라 등을 그대로 활용하면서도 고효율·저탄소 난방기기 시장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할 수 있는 수단이 된다. 즉 난방시장의 연착륙(soft landing)을 고민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글 – 김리안 한국경제 기자

※ 본 콘텐츠는 한국경제 김리안 기자의 기고를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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