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전환과 역사
인류가 가장 오랜 기간 사용해 온 연료는 나무이다. 나무는 에너지원 확보를 위한 별도의 탐사가 필요 없으며 주변에서 가장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자연 상태의 연료라 볼 수 있다. 나무를 비롯한 식물성 · 동물성 기름을 주 에너지원으로 오랜 기간 사용해 온 인류는 산업 혁명을 기점으로 첫번째 에너지 대전환을 이루어 낸다.
바로 석탄이라는 화석연료와 증기기관의 조합으로 대량 생산과 산업화를 실현하게 되면서 서구 열강들을 중심으로 역사상 가장 빠른 경제 성장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나무에 비해 열량과 에너지의 지속성이 좋은 석탄은 현재까지도 화력 발전의 주 에너지원으로 그 역할을 톡톡히 해주고 있다. 나무에서 석탄으로의 에너지 전환을 이룬 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석탄에서 석유로의 대전환이 일어난다.
1860년대에 석유가 처음 발견되었는데, 발견 초기에는 여전히 석탄이 주 에너지원이었고 석유는 석탄의 대체자원이나 램프 연료 정도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19세기 말, 미국이 석유를 선박의 연료로 사용하면서 석유에 대한 인식이 전환되었고, 석유는 석탄을 대체할 핵심 전략 자원으로 떠올랐다. 액체 상태의 석유는 석탄보다 부피가 작은데 효율까지 높았기 때문에 연료로서 확실한 장점이 있었다.
또한, 석유는 석탄에 비해 연소로 인한 분진 발생량 역시 현저히 낮아 석탄을 대체할 친환경(?) 연료로 주목받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 후, 석유는 ‘연료’로서의 가치에 더하여 석유화학공업의 주 ‘원료’로서 가히 현대판 연금술이라 불릴 정도로 다양한 소재와 제품을 탄생시키는 데 크게 기여한다.
연료와 생산원료는 산업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요소이다. 이 두 가지 요소를 가장 잘 다루는 기업들은 지난 100년간 세계 굴지의 석유 기업으로 거듭나게 된다. 서구 열강들은 엑손모빌(미국), 쉘(네덜란드), BP(영국), 토탈(프랑스) 등 각국을 대표하는 석유기업을 앞세워 보이지 않는 자원확보 전쟁을 지금까지도 하고 있다.
메이저 석유기업은 전 세계를 누비며 석유 · 가스 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탐사부터 생산에 이르는 상류(Upstream), 저장과 운송을 위한 중류(Midstream), 석유화학 공장에서의 정제와 제품을 생산하고 고객들에게 판매하는 유통망을 구성하는 하류(Downstream) 등 석유 산업을 구성하는 과정 전반을 아우르며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다. 그 결과, 2000년대 초에는 전 세계 자산 상위 10개 기업 중 절반을 석유회사가 차지하기도 했다.
에너지 전환의 주체
대한민국 역시 한국전쟁 이후, 경공업 중심의 산업 구조가 중공업 중심의 기간산업 구조로 변모하면서 석유화학 공업이 국가 산업의 중심에 서게 된다. 대한민국에서는 초기 사업단계에서 상당한 현금 투자가 필요한 상류 부문을 공기업인 한국석유공사가 담당하고 있다. 이에 반해, 하류 부문은 세계적인 수준의 석유화학 공정 및 정제 기술을 보유한 다양한 사기업들이 선도하고 있다.
이렇게 석유 산업이 국내 경제의 한 축을 떠받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혹자는 돌이 없어서 석기 시대가 끝나지 않았듯이 석유가 없어서 석유의 시대가 끝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야마니(前 사우디 석유장관)의 말을 인용하며 석유 시대의 종말이 임박했음을 시사하기도 한다. 그러나, 지난 20년의 청정에너지 기술의 발전 속도를 볼 때, 예상치 못한 혁신적인 기술의 탄생이나 에너지 패러다임 전환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석유의 시대는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에너지 대전환은 반백년 이상이 걸릴 초대형 프로젝트이며 에너지 전환이 이루어지는 기간 동안 완충재와 대체재 모두를 균형 있게 시장에 유지 · 공급할 필요가 있다.
완충재는 석유 · 가스를 기반으로 한 화석연료, 대체재는 청정에너지로 볼 때 양쪽 모두를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기업이 바로 석유 회사이다. 파리기후협약 이후, 탄소 저감이라는 시대적 요구를 반영하면서 메이저 석유회사는 전력 시스템과 풍력, 태양광 등 청정에너지 관련 인력을 확보함과 동시에 더 이상 석유기업으로 불리길 원치 않고 화석연료의 범주를 벗어나 다양한 에너지원을 다루며 에너지 공룡 기업으로 거듭나고 있다.
석유와 가스는 앞으로 반백년 간 급격한 에너지 패러다임 전환의 충격을 줄여줄 에너지원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가까운 미래에 이를 대체할 수 있는 다양한 후보 에너지원들이 있지만, 가장 현실적인 후보 중 하나가 수소이다. 수소는 연소 시에 오염물질이 발생하지 않는 청정에너지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전 세계에서 생산되는 수소의 98%가 석유에서 생산되는 회색 수소(Gray hydrogen)임을 볼 때, 수소 에너지가 화석연료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수소의 대량 생산을 위해서는 플랜트 운영 노하우와 공정 시스템 최적화 및 설계 기술을 보유한 석유화학 기업이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함은 분명하다. 완충재와 대체재 양쪽의 기술력을 가진 석유기업이 에너지 전환의 중심에 서 있다.
석유기업의 확실한 인프라와 기술 노하우, 그리고 미래
그렇다면 국내 석유화학 및 정유 기업들은 에너지 패러다임 대전환의 시대에 어떤 사업구조와 방향을 설정해야 하는가? 국내 정유기업은 지난 반세기 동안 축적해 온 자본력과 석유 화학 기술력, 그리고 탄탄한 인프라가 강점이다. 다르게 말하면, 국내 석유화학 및 정유기업들의 상업 네트워크와 인프라는 신생 에너지 기업들에게 큰 진입 장벽이다.
산업통상자원부 공고 제2021-806호를 기반으로 수소 경제 실현을 가정했을 때의 시나리오를 가정하고 석유 산업의 하류 시스템을 그대로 수소에 대입을 해보자. 현재에는 시장에서의 수소의 수요와 공급량이 석유의 그것에 한참 못 미치지만, 산업통상자원부의 로드맵을 미루어 볼 때 수소 시장이 성장할 것은 분명하다. 이에 대비해 석유의 정제, 저장과 운송에 독보적인 노하우를 보유한 석유화학과 정유 기업의 역할이 중요해질 것은 자명하다.
또한, 수소 생산량이 증가하고 이에 맞추어 수요와 공급망의 규모가 커지게 되면 저장 관련 문제가 중요해질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수소의 국내 수요가 비축을 고려할 만큼 크지 않지만, 미래에 수소가 지금의 석유와 같은 역할을 해내는 시기가 도래할 때는 유류 지하 비축기지와 같은 수소 지중 저장 시스템도 구축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이미 수소 지중 저장에 대해 세계 곳곳에서 활발히 연구가 수행되고 있다. 이탈리아와 독일은 지하 암염층에 공동을 만들어 수소를 주입 및 저장하는 실증 연구를 수행하는 단계에 있으며, 미국을 비롯한 스웨덴, 노르웨이도 수소 지중 저장 기술개발에 힘을 쏟고 있다.
엑손모빌, 쉘, 비피 등 메이저 석유기업들은 축적된 기술력과 막대한 자본을 바탕으로 로테르담 항구를 기점으로 대형 수소 단지와 청정에너지 컴플렉스 구축을 추진 중이다. 로테르담 프로젝트는 석유 기업이 다른 차원의 에너지 종합 기업으로 거듭나고자 시도하는 대표적 사례 중 하나이다.
필자가 보기에는 현재 전통적인 석유 기업들은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기후변화와 탄소 중립 에너지 기술의 발전을 주도하고 있다. 에너지 대전환의 시대에 에너지 공급의 청정화를 추구하는 동시에 글로벌 에너지 수요에 맞추어 안정적인 공급을 통해 시장에 급격한 에너지 전환의 충격이 없도록 조절하는 것 역시 테슬라나 반도체 기업, 빅테크 기업이 아닌 석유 기업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전 세계 수많은 석유화학 플랜트 역시 화학공학 기술의 집약체로 볼 수 있다. 새로운 물질을 합성하고 기존 소재의 약점을 보완하는 등 재료공학 · 화학공학적 기술력은 청정에너지로의 전환에도 필수 요소가 될 수밖에 없다. 본 칼럼에서는 청정에너지 중에서도 수소에 치중하여 시나리오를 소개하였으나, 플랜트 운영과 파이프라인 설계 및 유체 거동 모델링, 공정 시스템 설계와 최적화와 같은 원천 기술은 에너지 패러다임 전환의 전반에 걸쳐 사용될 것이며 그 어떤 산업보다 석유화학 · 정유 기업이 최고의 기술력을 확보하고 있다. 지난 반세기 동안 대한민국 산업의 근간을 이루어 온 석유 업계가 에너지 전환 패러다임의 중심에서 균형을 잡아주며 새로운 청정에너지 시대를 열어주는 리더 역할을 수행해 주기를 기대한다.
조용채 교수 -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에너지시스템공학부
텍사스 A&M 대학에서 지구물리학 박사 학위 취득 후, Schlumberger 지구물리연구소를 거쳐 Shell 기술연구소 선임연구원으로 근무했다. 2022년부터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에너지시스템공학부 조교수로 재직 중이며 미국 응용지구물리학회 연구위원과 유럽 응용지질과학회 편집위원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