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 속에서도 나라를 사랑했던, 감옥 속에서도 독립을 설파했던 만해 한용운
1910년, 한일 강제 병합으로 나라를 빼앗기자, 한용운은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는데요. 그는 중국과 만주, 시베리아 등을 돌아다니며 흩어져 있는 독립군 부대를 방문해 격려했습니다. 또 1919년 3.1운동 때는 독립선언서의 행동 강령인 ‘공약 3장’을 썼으며, 민족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기도 했죠.
최후의 1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활히 발표하라
출옥 후에도 한용운은 신간회를 결성해 치열하리만큼 일제의 침략에 맞섰습니다. 또 합병징병과 일제의 황민화 정책에 반대하며 군국주의를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스스로 고난의 칼날 위로 올라가 맨몸으로 불의와 싸웠고요.
이처럼 만해 한용운은 서리 밭 같던 시대에 대한독립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쳤지만 안타깝게도 광복 1년 전인 1944년, 끝내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독립서체 한용운
역경 속에서도 나라를 사랑했던, 죽음 앞에서도 민족을 사랑했던 매헌 윤봉길
고향에 계신 부모 형제 동포여! 더 살고 싶은 것이 인정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택해야 할 오직 한 번의 가장 좋은 기회를 포착했습니다.
백 년을 살기보다 조국의 영광을 지키는 이 기회를 택했습니다.
안녕히, 안녕히들 계십시오.
– 윤봉길 유서 중 동포에게 보내는 글-
1932년 4월 29일, 도시락 폭탄 거사가 진행되던 날 윤봉길은 25살의 청년이었습니다. 윤봉길은 김구 선생과 함께 김해산 집에서 마지막 식사를 마쳤는데요. 담담하게 고깃국을 먹는 윤봉길의 모습은 마치 농부가 일하러 나가기 전 배를 든든히 불리고자 식사하는 것 같았다고 전해집니다.
윤봉길은 식사를 마친 후 자신의 시계와 김구의 시계를 바꾸자고 청했다고 하는데요. “제 시계는 어제 선서식 이후 선생님 말씀에 따라 6원을 주고 구입한 것인데, 선생님 시계는 불과 2원짜리입니다. 하지만 제 시계는 이제 1시간 지나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이윽고 차에 오르는 윤봉길을 향해 김구는 목멘 소리로 “훗날 지하에서 만납시다”라며 마지막 인사를 전했습니다. 후일 김구는 백범일지에 윤봉길을 ‘천하영웅 떠나가다’라고 기록합니다.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의거홍커우 공원에는 일본군과 초청자 등 3만 명이 넘는 군중들이 모여 있었는데요. 도시락 폭탄과 수통 폭탄을 들고 간 윤봉길은 단상 뒤쪽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기미가요 합창이 끝날 무렵, 윤봉길은 단상 위로 폭탄을 투척했습니다. 이로 인해 일본의 상하이 파견군 총사령관인 시라카와 대장과, 상하이 일본거류민단장인 가와바다가 처단됐죠.
폭탄이 터지는 것을 본 일본 군중들은 윤봉길을 구타하기 시작했고, 피투성이가 된 그를 호위병과 헌병들이 체포했습니다. 윤봉길의 폭탄 투척 사건은 한국과 중국, 일본, 미국, 유럽 등 세계 각국의 주요 신문에 보도됐는데요. 이는 일제의 강점 하에 있는 한국 민족들이 독립을 갈망하고 있다는 사실이 전세계에 알려진 것입니다.
윤봉길의 상하이 의거는 한민족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워줬으며, 독립사상을 크게 고취시켜 독립에 대한 민족적 확신을 안겨줬습니다. 또한 일제의 발호로 독립운동에 대한 전망이 불투명해지면서 침체의 늪에 빠져있던 국내외 독립운동가들에게 광복에 대한 확고한 자신감을 갖게 하여 새로운 활로를 열어준 셈이기도 했고요. 결국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대한독립운동에 대단히 중요한 방점을 찍은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