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은 금방 지나가고, 벌써 최고 기온이 30도에 육박하는 날이 있을 정도로 여름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다들 올여름 무더위를 피할 휴가 계획은 세우셨나요?
제주도는 우리나라 대표 휴양지 중 하나인데요. 언제부턴가 많은 연예인이 제주에 거주지를 마련하고, 본업을 할 때는 도시로 돌아오는 모습이 꾸준히 방송에 노출되며 많은 이들의 부러움을 자아내고 있죠. 하지만 이는 특정 사람들만의 유별난 일상이 아니라, 달라진 사회 환경에 따른 자연스러운 변화 중 하나인데요. 이렇게 머무르는 공간에서 어울리는 공간으로, 고정되지 않고 다양한 방식으로 지역과 교류하는 도시를 ‘리퀴드폴리탄’이라 합니다. 인구 감소와 지역 불균형 문제를 안고 있는 우리나라에 리퀴드폴리탄의 등장이 새로운 희망이 될 수 있을까요?
일상의 연장, 여행하듯 사는 도시 리퀴드폴리탄의 등장
리퀴드폴리탄은 액체라는 뜻의 ‘Liquid’와 도시를 의미하는 ‘Politan’의 합성어로, 하나의 액체처럼 유연하고 서로 연결되며 다양한 모습으로 변하는 도시를 의미합니다. 매년 사회현상을 분석하고 진단하는 척도가 되는 10개의 트렌드 키워드를 발표하는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의 <트렌드코리아 2024>에서도 이 리퀴드폴리탄을 키워드 중 하나로 뽑았는데요. 이 유연한 도시가 올해의 사회상을 대표하는 현상 중 하나로 대두된 배경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교통망의 발전으로 물리적 거리의 제약이 줄어들고 있다는 점입니다. SRT, KTX, 비행기와 같은 고속 이동 수단의 등장으로 우리나라는 점차 일일 생활권 시대에 진입하고 있습니다. 이는 수도권의 교통 혼잡을 줄여주고, 도시에서 도시로의 이동이 수월해지게 해 사람들의 활동 반경이 넓어지고, 다양한 도시와 관계를 맺을 수 있게 하죠. 예를 들어 과거에는 서울 근무자가 약간의 불편함을 감수해도 경기도 출퇴근을 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면, 이제는 그 범위가 우리나라 전체로 확장되고 있죠.
두 번째는 디지털 기술 발전으로 인한 라이프스타일 변화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각종 전자기기에 익숙한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들은 어린 시절부터 휴대폰과 컴퓨터를 동시에 다루는 멀티태스킹에 능하며 짧은 콘텐츠로 여가를 즐기기 때문에, 한 콘텐츠에 길게 집중하지 못하고 여러 정보를 동시다발적으로 수용합니다. 흔히 Z세대라 불리는 이들은 자신에게 맞는 선택지를 끊임없이 탐색한다는 의미로 ‘플로팅세대(Floating Generation)’라고도 하죠. 이들은 디지털 기술을 통해 위치에 구애받지 않고 원격으로 업무를 수행하는 일이 익숙합니다. 때문에 유동적인 삶을 추구하고,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마치 유목민처럼 떠도는 디지털 노마드 스타일을 즐기는 성향이 강한데요. 지난 몇 년간 팬데믹으로 인한 재택근무, 휴양과 업무를 함께하는 워케이션 등 원격 업무 형태가 확대되면서 이 성향이 가속화되었죠.
이처럼 교통망과 디지털 기술 발전으로 넓어진 사람들의 생활 반경과 달라진 라이프 스타일은 자연스럽게 인구가 고정된 도시 개념을 약화시키고, 도시를 구축하는 인구 개념도 확장했습니다. 기존의 도시 인구는 지역에 일정한 주소지를 두고 머무는 ‘정주인구’만을 의미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정주인구에 여행을 온 외국인, 타지역에서 출퇴근하는 회사원, 치료를 위해 입원한 환자 등 특정 지역에 일정 생활을 영위하는 인구를 포함하는 개념인 ‘생활인구’, 주민등록 지역 외 1박 이상 머무는 인구를 의미하는 ‘체류인구’ 등 그 도시와 다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관계인구를 도시 인구로 간주하는 개념으로 변하고 있죠. 이처럼 도시를 구성하는 개인의 삶에 도시와 공간을 안착시키는 방식이 변하면서 그 사람들이 머물고, 일하고, 살아가는 도시도 변하게 됩니다. 그 변화된 도시가 바로 ‘리퀴드폴리탄’입니다.
MZ들의 여름 성지 ‘양양’으로 본 리퀴드폴리탄 성장을 위한 3요소
아무리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고, 도시의 개념이 변화되어도 도시에 매력이 없다면 찾는 이도, 머무르는 이도 없을 겁니다. 때문에 지방 도시가 활력을 찾고, 지역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도시 고유의 소재로 대체할 수 없는 매력을 만들어 사람들을 끌어들여야 하는데요. 대표적인 성공 사례가 바로 서퍼들의 천국 ‘양양’입니다.
강릉과 속초 사이 작은 어촌 도시 양양은 서핑의 인기와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관광지로 발돋움했죠. 양양은 주민등록 인구는 2만 7천 명 정도에 그치지만 체류인구를 포함하면 4만명에 달하며, 매년 4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서핑을 하기 위해 양양을 방문합니다. 때문에 양양은 지자체 차원에서 서핑 교육 시설과 관련 편의시설을 확충했습니다. 또한 통합 관광 앱 ‘고고양양’을 선보여 방문자들의 편의성을 높였죠. 이러한 노력으로 양양의 서핑 문화는 단순히 관광객들이 일회성으로 즐기는 체험이 아니라 양양을 찾는 이들의 라이프스타일 그 자체로 받아들여졌죠. 이는 매년 꾸준히 양양으로 모여드는 관계 인구의 증가로 이어졌고, 지역 경제가 성장했습니다. 사람들이 꾸준히 양양을 찾으면서 숙박과 외식업 등 다양한 일자리가 창출되고, 서핑족이 관심을 보일 법한 브랜드가 양양에 모여들었죠. 실제로 서핑 관련 산업의 경제효과는 2019년 228억원에서 2022년 657억원으로 급성장하며 양양은 인구소멸 위기를 극복했습니다.
양양의 성공 포인트는 크게 3가지인데요. 지역을 대표하는 ‘시그니처(서핑)’, 도시를 재해석하고, 그 경험을 디자인하는 ‘도시 기획(서피비치)’, 마지막으로 사람들의 의견을 모으고, 편의성을 제공하는 ‘커뮤니티(고고양양 앱)’입니다. 이 셋은 각각의 장점으로도 충분히 어필할 수 있지만, 함께 어우러져 시너지를 보일 때, 더욱 큰 효과를 발휘합니다. 양양의 해변은 서핑에 좋은 지형이기에 서핑이 양양의 시그니처가 될 수 있었죠. 하지만 황량하던 바닷가를 남태평양 분위기가 물씬 느껴지도록 꾸미고, 포토존까지 설치해 MZ세대가 원하는 서핑 해변을 조성한 ‘서피비치’가 없었다면 양양이 이처럼 빠르게 MZ 서퍼들의 핫플이 되기 어려웠을 겁니다. 여기에 파도가 없는 날을 체크하고, 서핑 관련 각종 정보를 제공하는 앱을 통해 사람들의 편의성까지 충족되면서 사람들이 서핑을 일회성으로 즐기는 게 아니라 꾸준히 지속할 수 있는 기반이 완성되었죠.
정부, 지자체 그리고 기업까지, 리퀴드폴리탄 성공을 위한 각자의 역할
리퀴드폴리탄 도시들은 유연한 구조로 다양한 지역과 유기적으로 연결될 수 있으며, 각 도시가 문화와 경험을 공유하며 도시가 균형적으로 발전할 수 있지만, 리퀴드폴리탄의 유동 인구들은 주거지역이 아니어서 지역 정책이 자신에게 이득이 되지 않는다거나, 불평등하다고 생각할 수 있죠.
이렇게 변하는 도시의 상황에 맞춰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정책이 적합하게 책정되어야 합니다. 특히 사람들에게 리퀴드폴리탄의 개념과 중요성을 인식할 기회를 제공하고, 유동인구들이 지역 발전에 자발적인 참여를 장려하는 정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죠. 지자체도 지역의 특성 및 자원을 적극 활용하는 방안과 리퀴드폴리탄으로 변해가는 도시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을 최소화하고, 지속가능한 도시 발전에 적합한 정책을 위해 고민을 이어가야 합니다.
기업들은 도시의 변화에 맞춰 도시의 고유한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개발 로드맵을 구성하고, 수익과 지원 사이의 균형감을 찾아야 합니다. GS칼텍스가 지역 활성화를 위해 전라남도 여수시에 설치한 남해 남중권을 대표하는 대한민국 대표 복합 아트센터 GS칼텍스 예울마루도 지역민의 문화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고, 호남권 문화예술의 랜드마크로 자리 잡아 가고 있는데요. 2012년 예울마루 개관에 이어 2019년에는 장도근린공원 ‘예술의 섬 장도’를 완성했으며, 최근에는 한국관광공사가 주관하는 지역 MICE 산업 미팅테크놀로지 지역 확산 지원 사업에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MICE 산업은 대규모 회의장이나 전시장과 같은 전문시설을 갖추고 국제회의, 전시회, 이벤트를 유치함으로써 경제적 이익을 창출해 내는 산업으로, 장도 입구에 프로젝트 맵핑과 디스플레이 콘텐츠를 설치해 4계절 낮과 밤 볼거리가 가득한 스마트 MICE 시설로 거듭날 예정입니다.
이번 여름, 휴가지를 아직 정하지 않았다면, 양양이나 제주를 방문해 ‘리퀴드폴리탄’으로 변해가는 도시의 모습을 느껴보는 건 어떨까요? 어쩌면 내년 여름에는 두 도시를 오가는 ‘리퀴드폴리탄’ 세대의 디지털 유목민으로 살게 될지도 모를 일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