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당 기사는 GS칼텍스서울Kixx배구단의 오랜 팬인 부산대학교 곽한영 교수님이 작성해준 글입니다.
이상한 일이다
GS칼텍스서울Kixx배구단이 2020-2021시즌 여자배구 정상에 올랐다. 이상한 일이다. 이야기를 이렇게 시작하는 것은 최고의 팀에 대한 예의가 아닐지도 모른다. GS칼텍스서울Kixx배구단의 팬으로서 가장 좋아하는 팀에 대한 자세는 더더욱 아닐 것 같다. 하지만 조근조근 따져보면 절로 그런 말이 나온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GS칼텍스서울Kixx배구단은 최고의 선수들이 모인 팀은 아니다. 외국인 선수 러츠는 206cm의 국내 최장신을 자랑하지만 프로경력이 이탈리아 2부리그 1년에 불과하고, 몸이 둔하다는 이유로 2018년 트라이아웃에서 어떤 팀의 선택도 받지 못했다가 2019년 재도전 끝에 선발된 선수다. 세터 안혜진은 들쑥날쑥한 토스로 안정감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고 있고 주장 이소영은 역량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잦은 부상으로 고생하고 있다. 센터 한수지, 권민지도 잇따른 부상으로 시즌 후반부에는 거의 출장하지 못했다. 리베로 한수진은 여러 차례 포지션을 변경한 끝에 올해 들어서야 처음으로 리베로 포지션에 자리를 잡았고 전체적으로 선수들의 평균 연령이 낮아서 분위기에 따라 경기력이 롤러코스터를 타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최강의 멤버들, 최고의 외국인 선수가 모였다는 쟁쟁한 팀들을 제치고 당당히 정상에 올랐다.
지난 5년 간 GS칼텍스서울Kixx배구단의 순위도 참 이상하다. 차상현 감독이 처음 팀을 맡았던 2016-17 시즌 여섯 개의 팀 가운데 최하위권인 5위로 시작하더니 이듬해 4위, 그 다음해 3위, 작년 시즌 2위까지 마치 계단을 오르듯 뚜벅뚜벅 오르더니 올해 마침내 1위에 올랐다. 더빨리 뛰어오르지도 않고 그렇다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으며 마치 오래 전부터 정해져 있던 길처럼 그렇게 한 단씩 차근차근 올라 마침내 정점에 섰다. 하나씩 배워나가는 아이, 하지만 한번 배운 것은 절대로 잊지 않고 성장하는 아이를 지켜보는 느낌이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단단해지고 점점 더 크게 자라나는 나무를 보는 느낌이다. 정말이지, 참 이상한 일이다.
허들링
황제 펭귄들이 서식하는 남극은 생물이 살아가기에 정말 극악한 환경이다. 펭귄들은 바다표범, 범고래 같은 포식자들의 위협에도 시달리지만 가장 힘든 것은 역시 추위다. 특히 4개월 간 이어지는 겨울엔 영하 40-50도, 최대 영하 88도까지 내려가고 여기에 시속 140km의 눈폭풍까지 휘몰아친다. 펭귄이 포식자들에 맞설 강한 이빨과 근육이 있었다면 이 추운 계절을 더 따뜻한 곳으로 이동해서 보낼 수 있겠지만 움직임도 둔하고 힘도 약한 펭귄들은 오히려 천적을 피해 가장 추운 곳을 찾아간다.
이렇게 얼어붙은 대지에서 황제펭귄이 살아남는 방법은 서로서로 꼭 붙어서는 것이다. 마치 한덩어리로 묶인 장작처럼 펭귄들은 촘촘하게 몸을 밀착시켜서 체온을 유지한다. 하지만 이 상태가 유지되면 바깥쪽의 펭귄들은 추위와 눈폭풍에 지쳐 쓰러지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바깥 쪽의 펭귄들이 조금씩 안쪽으로 들어오고 대신 몸이 데워진 안쪽의 펭귄들이 바깥으로 나서서 추위를 막는다. 이렇게 뭉쳐서 추위를 이겨내는 전략을 ‘허들링’(huddling)이라고 한다. 겨울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며 이들은 4개월 동안 끊임없이 안과 밖을 오가며 버틴다.
꽤 현명해 보이는 이 전략이 실제로 적용되는데는 중요한 두 가지 전제가 있어야 한다. 하나는 ‘신뢰’다. 바깥쪽에서 추위에 떨고 있는 펭귄들이 버티기 위해서는 나도 언젠가 저 따뜻한 안쪽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친구들이 내 추위를 외면하지 않고 기억해줄 거라는 확신이 있어야한다. 확신이 아니어서는 곤란하다. 이건 목숨을 건 선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번째 전제는 더 어렵다. 이미 안쪽에 들어와 있는 펭귄들이 과연 바깥으로 나가려할 것인가의 문제다. 그게 집단의 생존전략이라 할지라도 딱히 강제할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 엄청난 고통과 생존의 불안에 시달려야하는 바깥쪽으로 향하는 마음에 필요한 것은 ‘연민’이다. 고통에 대한 공감이다. 바깥에 있는 이들이 얼마나 힘들 것인가 헤아리고 그 고통이 나 자신의 감각기관에 고통으로 전달되는 공감각이 있을 때 비로소 펭귄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추위와 눈보라가 기다리는 바깥쪽으로 주저없이 걸어나갈 수 있게 된다. 신뢰와 연민.
그래서 두 번째 전제는 더 어렵다. 이미 안쪽에 들어와 있는 펭귄들이 과연 바깥으로 나가려할 것인가의 문제다. 그게 집단의 생존전략이라 할지라도 딱히 강제할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 엄청난 고통과 생존의 불안에 시달려야하는 바깥쪽으로 향하는 마음에 필요한 것은 ‘연민’이다. 고통에 대한 공감이다. 바깥에 있는 이들이 얼마나 힘들 것인가 헤아리고 그 고통이 나 자신의 감각기관에 고통으로 전달되는 공감각이 있을 때 비로소 펭귄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추위와 눈보라가 기다리는 바깥쪽으로 주저없이 걸어나갈 수 있게 된다. 신뢰와 연민.
두 개의 장면, 두 개의 눈물
개인적으로 이번 시즌 GS칼텍스서울Kixx배구단 최고의 순간으로 꼽고 싶은 두 개의 장면이 있다. 첫 번째는 센터 김유리 선수가 데뷔 이후 처음으로 경기 수훈 선수에 선정되어 단독 인터뷰를 하던 장면이다. 김유리 선수는 2010년 신인드래프트 1라운드 전체 2순위로 흥국생명에 선발된 유망주였다. 하지만 겨우 2년 만에 배구선수 커리어를 접고 은퇴하는 극단적인 결정을 내리게 된다. 이후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김유리는 배구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실업팀에서 뛰다가 기업은행으로 프로에 복귀했고 다시 현대건설로, 그리고 뜬금없이 그 다음날 GS칼텍스서울Kixx배구단으로 재트레이드된다. 차상현 감독이 부임하던 시점에 김유리는 어느덧 GS칼텍스서울Kixx배구단에서 고참급의 클럽하우스 리더 역할을 맡게 된다. 김유리는 자신이 신인때 받았던 고통을 떠올리며 한참 후배들에게 항상 먼저 친구처럼 다가가고 격의없이 장난을 쳤다. 웜업존에 있는 후보선수들과 함께 응원하는 문화도 앞장서서 만들었다. GS칼텍스서울Kixx배구단은 가장 젊고 가장 분위기 좋은 팀으로 변모해갔다.
하지만 프로의 세계에서 ‘사람이 좋다’는 말은 어쩌면 칭찬이 아닐 수도 있다. 센터로서 김유리의 입지는 점점 좁아져갔다. 블로킹 능력은 새로 영입된 한수지가 앞섰고 공격력은 열 살 후배인 권민지의 힘에 밀렸다. 이번 시즌을 맞아 어떻게든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려고 자그마치 10킬로그램이나 감량했지만 돌아온 것은 오히려 우울증 뿐이었다. 그런데 시즌 중반 이 두 센터가 연달아 부상을 당하면서 김유리에게도 출장 기회가 찾아왔다. 그리고 운명의 2월 5일, 최강의 상대인 흥국생명을 맞아 김유리는 속공 8득점을 포함해서 총 9득점을 만드는 눈부신 활약을 보이며 GS칼텍스서울Kixx배구단에 3-0 셧아웃 승리를 가져왔다. 자신을 은퇴의 나락으로 밀어넣었던 흥국을 상대로 한 승리였기에 김유리에겐 더욱 의미가 컸을 것이다. 그리고 경기 후 수훈선수로 김유리가 선정되어 방송사와 단독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김유리가 프로에 들어온 이후, 그러니까 평생 처음 해보는 수훈선수 인터뷰였다.
일반적으로 경기 직후인 이 시간은 수훈선수만 따로 인터뷰 판넬 앞으로 가고 나머지 선수들은 마무리 스트레칭을 하고 신발과 복장, 장비를 정리하는 시간이다. 하지만 큰언니, 율대장의 평생 첫 인터뷰를 응원하기 위해 선수들도, 감독도, 코칭스태프와 통역사도 모두모두 김유리의 앞에 옹기종기 모여앉았다. 수훈선수 인터뷰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모든 선수들이 마치 허들링을 하는 펭귄들처럼, 김유리를 둘러싸고 원을 그렸다. 그리고 그 원의 한가운데에 처음 서서 따뜻함을 맛본 김유리는, 그만 눈물을 흘렸다. 함께 살을 맞대고 살아온 선수들도 함께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두 번째 장면에도 눈물이 등장한다. GS칼텍스서울Kixx배구단이 흥국생명과 한창 엎치락뒤치락 선두다툼을 하던 3월 5일 현대건설과의 경기였다. 시즌 후반 들어 양효진을 비롯한 막강한 센터진이 엄청난 위력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에 센터진이 약한 GS칼텍스서울Kixx배구단과는 아주 상성이 좋지 못한 대결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1위의 위엄도 무색하게 첫 세트부터 GS칼텍스서울Kixx배구단은 밀리기 시작했고, 팽팽한 줄다리기 끝에 1세트를 내주자 2세트부터는 리시브라인, 2단 연결, 오픈 공격들이 전부 무너지면서 GS칼텍스서울Kixx배구단은 마치 난파선처럼 걷잡을 수 없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수습한 것은 주장 이소영이었다. 일단 자신에게 오는 볼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무조건 처리하고, 팀원들이 어떤 실수를 저질러도 탓하지 않고 쉴새없이 화이팅을 외쳤다. 거의 넘어간 것 같았던 3, 4세트의 고비마다 끝까지 공을 향해 죽어라 달려드는 이소영의 모습에 다른 팀원들은 힘들어도 힘든 티를 내기가 미안할 지경이었다. 부상 당하고 지쳐서 그냥 주저앉으려는 소대원들의 멱살을 쥐고, 등에 들쳐업고 계속 고지를 오르는 소대장의 모습이랄까. 마지막 5세트는 기적적인 드라마의 절정이었다. 15점으로 짧게 끝나는 5세트에서 9대 4까지 점수가 뒤져서 거의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 순간, 새로 투입된 유서연의 서브 순서에서 7 연속 득점이 이루어지면서 경기가 11 대 9로 뒤집혔다. 이 과정에서 가장 눈부시게 빛났던 것도 역시 이소영이었다. 이소영은 5세트에만 6득점을 몰아치는데 혼을 실어서 무아지경으로 내리꽂는 스파이크에서 불꽃이 느껴질 지경이었다.
기적의 역전승을 거두고 난 후, 이소영은 당연히 수훈 선수에 선정되어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인터뷰 전에 이소영은 한동안 코트 바닥에 주저 앉아 있더니 눈물을 흘리며 인터뷰에 응했다. 기자가 울고 있는 이유를 물었다. ‘너무 힘들었어요.’라고 말할 줄 알았다. 당연하지 않나? 그저 조그만 중계화면을 통해 구경하고 있던 나조차 이렇게 힘들 지경이었으니. 하지만 이소영의 대답은 달랐다.
처음부터 제가 잘 했으면 쉽게 갈 수 있었을 텐데 미안했고 그래도 잘 버텨준 팀원들에게 고마워서 울었어요.
아마 이 경기를 다 본 사람들이라면 이소영의 말이 하나도 공감이 안갈 것이다. 이소영은 처음부터 끝까지 잘했고 이소영이 미안해할 만한 팀원은 한 명도 없었다. 팀원들이 잘 버텨줬는지도 모르겠고 뭐가 고마운지도 잘 모르겠다. 그런데 이소영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으니 그럴 수 있겠다 싶다. 그런 것이 되어버렸다. 멱살을 잡고 끌고 가도 일단은 끌려서라도 오는 팀원들이 있어야 전투가 되고 경기가 되는 것이다. 죽어라 계속해서 때리려고 해도 죽이든 밥이든 받아주고 올려주는 팀원들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다. 지적하고 타박하는 것은 감독과 코칭스태프의 일이고 주장의 일은 동료들과 함께 가는 것이다. 안되는 거 커버해주고 잘되는 거 고마워하고 그래서 만든 결과를 ‘함께’ 짊어지는 것이 ‘팀’이다.
사막을 건너는 법
바깥은 지옥이라고들 한다. 살아가는 게 왜 이리 힘드냐고도 묻는다. 부동산 문제, 취업문제, 저출산과 고령화에 여성에 대한 부당한 대우와 지워지지 않는 학교폭력의 상처까지, 안그래도 고통이 많은 세상에 코로나19라는 검은 장막까지 드리워졌다. 세상은 부글부글 열사가 작열하는 뜨겁고 메마른 사막같은 곳이고, 삶은 그 끝없는 사막을 건너는 일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생텍쥐베리의 어린 왕자는 사막이 아름다운 이유가 어딘가에 우물이 숨어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우물은 사막이 아름다운 이유일지는 몰라도 사막을 건너게 해줄 수는 없다. 사막을 건너게 하는 힘은 어쩌다 행운처럼 등장하는 오아시스가 아니다. 느려도 포기하지 않고 걷는 낙타들, 그리고 그 낙타들을 믿고 죽음의 땅으로 과감하게 발을 들여놓는 사람과의 교감이다. 다시 한번, 신뢰와 연민.
생텍쥐베리의 어린 왕자는 사막이 아름다운 이유가 어딘가에 우물이 숨어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우물은 사막이 아름다운 이유일지는 몰라도 사막을 건너게 해줄 수는 없다. 사막을 건너게 하는 힘은 어쩌다 행운처럼 등장하는 오아시스가 아니다. 느려도 포기하지 않고 걷는 낙타들, 그리고 그 낙타들을 믿고 죽음의 땅으로 과감하게 발을 들여놓는 사람과의 교감이다. 다시 한번, 신뢰와 연민.
좋은 팀이란 어떤 팀일까? 현재 우리가 사는 집은 대부분 철근콘크리트로 만들어져있다. 가장 단단한 벽과 천정을 만들기 위한 고심의 결과물이다. 단단한 벽은 크고 단단한 돌들을 잔뜩 모아 쌓는다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갈도 들어가고 모래도 들어가고 꺾이고 당겨질 때를 대비해서 철근도 들어가고, 그렇게 불균질한 것들의 조화와 융합을 통해 ‘철근콘크리트’의 거대한 건물이 지어진다. GS칼텍스서울Kixx배구단은 최고의 선수들이 모인 팀은 아닐지 몰라도 다양한 선수들이 끈끈하게 뭉쳐 서로서로를 기대어 세우는 팀이다. 안혜진이 힘들면 이원정이 들어가고, 강소휘가 지치면 유서연이 뒤를 받친다. 서브리시브는 한다혜가 맡고 수비커버는 한수진이 달려든다. 한수지가 다치면 문명화가 블로킹벽을 세우고, 권민지가 허둥대면 김유리가 속공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모든 불균질한 요소들을 선수들과의 친밀한 교감을 통해 애정과 신뢰로 한데 뭉치는 차상현 감독의 리더쉽이 있다. 웜업존의 선수들도 함께 작전지시를 듣고, 쉴새없이 코트 안의 선수들에게 힘을 불어넣으며, 경쟁상대라야 할 같은 포지션의 선수들끼리 좋아서 어쩔줄 모르며 얼싸안는 팀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는 팀, 모기업의 슬로건이 이렇게 잘 어울리는 팀이 있을까?
‘I am your Energy!’
‘I am your Energy!’
팀은, 좋은 팀은 완벽한 선수들의 조합으로 만들어지는 ‘실체‘가 아니라, 오히려 부족한 것이 많은 선수들이 서로를 연민하고 빈자리를 메꾸려 도우며 도달하는 어떤 ‘상태’가 아닌가 싶다. 허들링하는 펭귄들, 약하고 결점이 많지만 체온을 나누는 것을 서슴지 않고 어느 순간 단단히 뭉쳐 밝게 타오르는, 마치 불꽃처럼, 흔히 쓰는 표현대로 화학적 반응, ‘chemistry’가 폭발하는 어느 찬란한 순간. 이번 2020-2021 시즌의 GS칼텍스서울Kixx배구단은 바로 그 눈부시게 빛나는 순간을, 불완전한 경기력을 가진 가장 완벽한 팀의 모습을 보여줬다. 정말이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