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석유 수급 위기 속 정제설비 능력, 한국에겐 기회의 해!

GS칼텍스 -

원유가 넘쳐나도 완제품 석유제품을 생산할 정제 능력이 부족하면 ‘에너지 쇼티지(shortage)’를 막을 수 없다. 비가 내리는데 가둘 댐 용량이 작아 해갈하지 못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팬데믹 과정에서 세계 석유 수요가 급감하며 폐쇄 정제설비가 늘었고, 탄소중립으로의 전환 속에서 정유 설비 신증설 투자까지 위축되며 글로벌 수급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다행스러운 것은 내년에는 세계 정제설비 순증설이 예상된다는 점이다. 원료인 원유 수급만 원활하다면 완제품 석유를 찍어내는 정제설비 부족으로 인한 수급난은 겪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다. 그 한편에서는 세계 5위 정제능력을 보유한 우리나라 정유사들이 내수를 채우고 남은 물량을 수출하며 부가가치를 창출해 부러움을 사고 있다.

정제설비는 왜 줄고 있는가?

경기가 호황이면 에너지 수요가 늘어나 석유 가격이 상승할 가능성이 높다. 반대의 경우라면 소비가 줄어 에너지 가격은 떨어질 수 있다. 수요와 공급에 기초한 일반적인 원칙이 그렇다. 다만 현실에서의 국제유가는 산유국과 소비국 간 다양한 이해관계가 맞물리고 지정학적 요인을 비롯한 다양한 변수가 작용한다는 점에서 수요-공급 원칙에 기반한 예측을 ‘확신’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

그런데 최근 들어 글로벌 석유 가격과 수급 여건을 결정하는 변수로 정제 설비 능력이 주목받고 있다. ‘정제 설비 능력(Oil Refining Capacity)’은 말 그대로 원료인 원유를 석유제품으로 생산할 수 있는 설비 용량을 말한다. 안정적인 정제설비 확보가 원유 수급만큼 중요한 이유는 실생활에서 사용되는 에너지가 휘발유, 경유, 등유 같은 정제된 석유제품이기 때문이다.

석유산업 호황기에는 돈이 되는 정제산업에 투자가 몰리며 신증설이 이어졌지만 최근 수년 사이 노후 설비를 폐쇄하거나 바이오에너지 생산 용도로 전환하는 사례 등이 늘면서 세계 정제설비 능력이 후퇴하고 있는데 그 원인 중 하나를 설명하는 흥미로운 분석이 눈길을 끈다. 유안타증권 황규원 애널리스트는 ‘글로벌 정유 업황을 결정짓는 것은 석유제품 수요 공급 밸런스로, 글로벌 정유설비 가동률 즉 석유 수요 대비 가동 가능한 정유 설비 비율이 중요한 기준이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글로벌 정유설비 가동률이 82%이면 석유 수요 공급은 균형 상태에 접어들고 83.7%를 넘어서면 과열 국면에 진입하게 된다. 실제로 지난 1월 첫째 주 배럴당 92불을 기록했던 국제 경유 가격이 6월에는 180불로 2배 폭등했고 올해 글로벌 정유설비 가동률은 84~85% 수준을 기록하며 ‘과열 국면’을 경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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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정유설비 가동률, 출처: 유안타증권
황규원 애널리스트는 ‘정유설비 가동률이 80%로 떨어지면 반드시 정제 설비 폐쇄가 시도된다’고 언급했는데 실제로 팬데믹이 본격화되던 2020년 가동률은 73%까지 추락했다. 특히 그 해 4월 경유 국제 가격은 1배럴에 26불로 올해 6월의 180불에 비해 14% 수준에 거래됐고 정유산업은 심각한 경영난에 처했는데, 이 시기를 전후해 호주, 쿠웨이트, 싱가포르, 일본 등의 글로벌 정제설비 폐쇄가 이뤄졌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미국에서는 정제공장을 바이오에너지 생산 용도로 전환하는 일도 벌어졌다.

다행스러운 점은 내년 글로벌 정제설비 가동률이 수요 공급 사이의 균형점인 82%를 살짝 웃도는 82~83%로 예상된다는 점인데, 이 시나리오가 적중하면 정제설비 부족으로 석유제품 가격이 급등하는 사태는 발생하지 않을 것으로 기대된다.

ESG 경영 기조 확산되며 정제 산업 투자 기피

석유산업 호황기에는 돈이 되는 정제산업에 투자가 몰리며 신증설이 이어졌으니 원료인 원유를 안정적으로 조달하는 것만 신경 쓰면 됐다. 그런데 팬데믹을 겪으며 세계적으로 석유 수요가 급감했고 전 세계적으로 ESG 경영이 화두로 떠오르면서, 화석연료 기반의 정제설비에 대한 투자 회피로 정제 설비 능력이 부족한 상황에 처해지고 있다. 정제설비 부족 현상이 더욱 심각한 것은 자본이 투입된다고 해도 단시간 내에 건설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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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정제 설비 능력 추이, 출처: IEA
고유가 해소를 위해 원유 생산을 늘리라는 미국 등 주요 석유 소비국들의 요구에 석유 가격 급등 원인은 정제설비 부족 때문이라며 주요 산유국들이 반박하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지난 5월 열린 다보스 세계경제포럼에서 사우디아라비아의 파이살 빈 파르한 알 사우드(Faisal bin Farhan al-Saud) 외무장관은 ‘최근 2년 여간의 정제 부문 투자 부족이 석유제품 공급 부족의 주요 원인으로, 단순히 원유를 더 많이 공급하는 것만으로는 소비자 부담을 경감할 수 없다’고 평가했다.

세계적으로 ESG 경영 기조가 강조되고 있지만 탄화수소체인 석유 없이는 발전조차 제한되는 냉정한 현실을 국내 한 증권사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유안타증권은 최근 발간한 리포트에서 ‘탈탄소라는 글로벌 담론 속에서 석유제품 수요의 피크 아웃(Peak-Out) 논란이 확대되며 정유 설비 과잉 우려가 커졌는데, 현실에서는 설비 공급 부족 현상이 나타나는 아이러니가 일어나고 있다’고 평가했다.

팬데믹에서 벗어나면서 휘발유, 항공유 같은 수송용 연료 소비가 급증하고 있고 유럽에서는 가격이 급등한 천연가스 대체재로 경유 수요가 늘고 있는데, 이를 충족시킬 만큼의 정제 설비 능력이 부족해 수급난을 내몰리고 있는 상황을 빗댄 표현으로 이해된다. 유안타증권은 2019년 이후 ESG 요구가 확산되면서 정유산업이 ‘탄소 배출 위험산업’으로 지목돼 설비에 새롭게 투자하려는 의지가 약화되고 있다며, 2023년에도 정유설비 투자 지연 움직임이 이어질 것으로 전망했다.

러시아산 석유 수입 통제·중국 방역 완화도 변수

다만 다행스러운 것은 내년 세계 정제설비 증설 규모가 예정된 폐쇄 설비 능력보다는 클 것으로 전망된다는 점이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내년 세계 정제 설비 능력 증가 속도가 빨라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전 세계적인 탄소 저감 기조에 더해 코로나19 팬데믹까지 겹치면서 2021년 기준 세계 정제 설비 능력은 30년 만에 감소세로 돌아섰는데 올해 들어 다시 성장세를 기록 중이다. 전년 대비 하루 100만 배럴 규모의 정제 설비 능력이 추가됐는데, 내년에는 이보다 큰 160만 배럴 수준이 늘어날 것으로 IEA는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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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정제 설비 능력 순증, 출처: IEA
특히 아프리카 대륙의 나이지리아와 중동 산유국인 쿠웨이트에서 일산 60만 배럴이 넘는 대형 정제설비 가동을 앞두고 있다. 원유 수급 여건과는 별개로 정제 설비 능력 확장이 예고되면서, 완제품 석유제품을 비롯해 특히 유럽 중심으로 수급난을 겪고 있는 등·경유 공급 루트가 늘어 날 수 있어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렇더라도 정제설비 순증설 규모가 석유 수요 증가분에 미치지 못하다는 분석이 유력하다.NH투자증권은 내년 세계 정유 산업의 수요-공급 밸런스가 타이트할 것으로 예측했다. NH투자증권은 내년 세계 원유 수요가 올해 대비 하루 148만 배럴 늘어난 1억 99만 배럴에 달할 것이라는 미국 에너지정보청 분석을 전제로, 2023년 정제설비 증설량은 하루 120~150만 배럴로 석유 수요 증가량과 비슷하거나 소폭 못 미쳐 정유 산업의 타이트한 수급 상황이 지속될 것으로 내다봤다. 요약하면 설비 폐쇄, 신규 투자 지연 등의 영향으로 일시적으로 감소했던 정제설비가 내년 이후 늘어나겠지만, 여전히 수요 증가분에는 미치지 못해 글로벌 석유 가격 강세가 유지될 가능성이 높다.

유럽의 경유 부족 지속 여부, 중국의 제로 코로나 정책 향방에 따라 석유 수급이 언제든지 위협받을 수 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유럽연합(EU)과 주요 7개국(G7)은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경제 제재 일환으로 내년 2월 이후 러시아산 석유 제품의 해상 운송 수입을 금지한다는 계획이다. 러시아는 하루 686만 배럴 규모의 정제 설비를 보유하고 있고 이 중 150만 배럴 정도를 유럽으로 수출해 왔는데, 러시아산 석유 수입을 차단하면 EU 입장에서 대체 공급원을 발굴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유럽 에너지 부족 사태를 완화하기 위해 미국이 앞장서 천연가스와 석유제품 수출을 확대했던 것도 앞으로는 장담할 수 없다. 미국 바이든 대통령이 자국 내 석유 가격 안정을 위해 정유업체 대상으로 석유 수출 금지와 재고 확보를 주문하고 있는데, 만약 의무화된다면 유럽의 수급 위기는 더욱 심각해질 수 있다.

제로 코로나 정책에 반발하는 시위가 확산되면서 중국 정부가 전향적으로 봉쇄를 완화하면 석유 소비가 급격하게 회복될 수 있다는 점도 내년 세계 석유 수급을 결정짓는 중요한 변수로 작동할 수 있다. 내년의 정제 설비 순증설 전망에도 불구하고 세계 석유제품 수급을 위협할 요인들이 적지 않다는 점에서 올해만큼은 아니더라도 당장의 원활한 석유 공급과 가격 안정을 기대하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글로벌 수급난에도 석유 수출하는 한국, 부러움 산다

우리나라는 원유 전량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최근 경험한 것처럼 글로벌 결제 통화인 달러화 가치가 급등해 수입 물가에 악영향을 미치는데도 정부가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제한적이다. 산유국 감산을 포함한 다양한 국제 에너지 시장 정세와 환율 등의 영향으로 우리나라의 원유 수입 비용이 급등해도 정부가 대응할 마땅한 방법이 없는 셈이다.

지난해 11월 이후 휘발유, 경유, LPG 부탄에 부과되는 유류세를 인하하며 소비자 부담을 낮추고 비축유를 방출한 것 정도가 유가 급등 시점에 정부가 동원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카드다. 이조차도 원유와 국제 석유 가격 상승 폭이 커지면 세금 인하 효과는 희석돼 소비자 부담은 다시 높아지게 된다.

불행하게도 빈약한 자원 부존의 태생적인 한계를 감내할 수밖에 없는데, 그나마 다행스러운 대목은 유럽 등과 달리 정제 설비 부족에 기인한 석유제품 수급난에서는 자유로울 수 있다는 점이다.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서방 세계의 대응으로 EU는 러시아산 원유, 천연가스 수입을 줄이는 방식으로 경제 제재를 가하고 있다. 그런데 오히려 러시아가 EU에 대한 천연가스 수출을 줄이며 자원 무기화에 나서고 있다. 천연가스를 비롯해 원유, 석유제품 등 에너지 전반의 러시아 의존도가 높은 EU의 약점을 러시아가 파고들면서, EU는 가격이 급등한 천연가스를 대신해 경유 소비를 늘리고 있고 전 세계적으로 연쇄적인 석유 부족을 겪고 있다. 휘발유보다 낮은 유류세에도 불구하고 이례적으로 우리나라 경유 소비자 가격이 더 높게 형성되고 있는 것도 유럽발 경유 수급 불안에 따른 국제 가격 급등이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수출 전략 업종인 정유산업 덕분에 수급 불안 위협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BP Statistical Review of World Energy’ 2021년 판에 따르면, 우리나라 정유사들의 ‘정제 설비 능력(Oil Refining Capacity)’은 하루 357만 2,000배럴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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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국가별 정제 설비 능력, 출처: BP
미국, 중국, 러시아, 인도에 이어 세계 다섯 번째 정제설비 능력을 보유하고 있고 우리나라 보다 경제 규모가 큰 일본보다도 많다. 한국석유공사에 따르면 팬데믹에서 회복되던 2021년 우리나라 하루 석유제품 소비 규모는 256만 배럴을 기록했다. 산술적으로 우리나라 정유사들은 내수 소비 보다 약 39.5%에 달하는 초과 정제 능력을 보유하고 있고 특히 값싼 중질유에서 휘발유, 등·경유 같은 고부가가치 석유제품을 추출하는 고도화설비 비중도 높아 유럽 국가들처럼 수급 불안에 시달릴 이유가 없고 석유 수출 과정에서의 부가가치는 높아지고 있다.

탁월한 정제설비 능력이 국가 무역 수지를 높이는 데 한몫하고 있는 것은 통계로도 확인되고 있다. 올해 들어 지난 11월까지 우리나라 전체 수출액은 6,291억 불로 집계됐다. 그런데 이중 석유제품 수출액이 582억 21,00만 불에 달했다. 국가 전체 수출액 중 석유 기여도가 9.3%에 달했으니 우리나라 수출액 100원 중 10원이 석유에서 발생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나라 정유사들은 내수 소비를 크게 뛰어넘는 물량의 원유를 수입하고 있다. 이 기간 동안 우리나라가 수입한 원유는 975억 5,000만 불에 달했다. 그런데 정유사들은 582억 불의 석유제품을 수출했으니 금액 기준 단순 환산 시 수입 원유 금액 중 60%를 석유 수출도 다시 벌어들였다. 전 세계적인 정제 설비 부족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유사들은 규모의 경제를 갖춘 수출 전략적인 생산 능력을 보유하고 있어 국가 무역 수지 개선과 석유 수급 안정 등에 기여하고 있으니 세계의 부러움을 살 만하다. 그런 측면에서 우월한 정제설비 능력을 보유한 한국 정유사에게 내년 역시 기회의 해가 될 것이라는 기대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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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 - 에너지플랫폼뉴스

전북대학교에서 독어독문학을 전공했다. 하지만 전공과는 상관없는 에너지 분야 전문 언론에서 20년 넘는 세월을 몸담고 있는 에너지 분야 전문 기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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