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한 물 아래 잠긴 푸른 섬.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자원인 물의 ‘근원(source)’을 표현한다면 이런 모습일까. 곳곳에 형성된 봉우리와 계곡은 실제 수면 위 인간이 발을 디디는 섬의 모습과 흡사했다. 마치 물 자원이 샘솟는 곳 또한 인간이 살아가는 육지와 다르지 않다는 점을 보여주는 듯했다.
글로벌 디자인 최신 트렌드를 한눈에 보여주는 세계 최대 이벤트 ‘밀라노 디자인 위크’. 올해 62번째를 맞은 이 행사는 지난 4월 16~21일(현지 시각) 개최된 가운데 35개국 1,950개 업체가 참여했고, 총 36만 명 이상이 다녀갔다. 이 중 절반 이상인 53.4%가 해외 방문객으로 밀라노 디자인 위크가 명실상부 세계적인 디자인 전시라는 점을 재확인했다.
물 상징 ‘Under the Surface’ 주목
이처럼 디자인의 ‘정수’가 집결되는 전시장 한가운데 위치한 파빌리온10에는 관람객의 눈길을 끄는 조형물이 설치돼 있었다. 바로 물에 잠긴 섬을 표현한 ‘Under the Surface(수면 아래)’였다. 이는 올해 전체 전시를 관통하는 철학을 담은 것으로 밀라노 디자인 위크 주최 측에서 가장 상징적으로 내세운 작품이다. 이탈리아 디자인 그룹 Accurat과 뉴욕에서 활동하는 밀라노 출신 작가 Emiliano Ponzi가 디자인하고 설치했다.
Under the Surface는 물속에 잠긴 섬의 형태로 이는 물의 상징을 의미한다. 프로젝트의 가장 큰 목표는 수자원 보존에 대해 연구하고 그동안 지구촌 곳곳에서 물을 아낌없이 써온 것에 대해 반성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앞으로 출시될 욕실 가구 및 제품의 방향성을 제시해 욕실서부터 물을 절약할 수 있는 디자인이 반영돼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실제 작품 외부 곳곳에는 세계은행에서 분석한 물 소비량 정보가 적혀 있었다. 주최 측 관계자는 “욕실 제품의 물 발자국을 측정해 지구에서 가장 귀중한 자원을 책임감 있고 효율적으로 사용하자는 메시지를 담았다”고 설명했다.
에너지 남용에 대한 인류 반성 담겨
이번 작품은 관람객에게 물 자원 절약의 경각심을 일깨우는 취지를 담고 있다. 실제 전 세계 23억 명 이상의 인구가 먹는 물에 접근할 수 없고, 36억 명은 안전하게 관리되는 위생수 없이 살아가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같은 지구상에서 아무런 물 부족 없이 살아가는 동시대 인류가 있다. 통상 샤워기를 통해 분당 15ℓ의 수돗물을 소비하고, 수도꼭지로 세면 시 분당 7.5ℓ의 물을 소비한다. 지금 이 시간 아무 생각 없이 수돗물을 틀어 놓고 세수를 하거나 양치질을 할 때 누군가는 단 한 모금의 물도 없이 생존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Under the Surface는 많은 욕실 제품 기업과 디자이너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전 세계적인 물 부족과 차별적인 물 사용에 대해 어떤 해결책을 내놓을 수 있냐는 것이다. 다행히 이번 디자인 위크 기간 내 국제 욕실 전시회에서는 작게나마 해답을 엿볼 수 있었다.
공기와 물을 혼합하는 기술은 물 출력량이 현저하게 줄어도 일정한 흐름을 보장한다. 이를 통해 각 물방울에 약간의 공기를 주입하는 샤워헤드는 최대 45%의 물을 절약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매년 가구당 262개의 욕조에 물을 꽉 채운 수준의 양이다. 이와 함께 수돗물 통풍기는 물 소비량을 최대 50%까지 줄일 수 있고, 현대식 라디에이터도 기존 관형 모델보다 최대 80% 적은 물을 사용할 수 있다고 주최 측은 설명했다.
이번 작품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에너지 소비 감소 중요성도 강조한다. 2023년에는 전 세계적으로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37.4Gt(기가 톤)으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1년 만에 4억1,000만t이나 증가한 셈이다.
이에 따라 이번 전시회에서 다수의 욕실 가구 회사들도 UN의 ‘지속가능발전목표7(Sustainable Development Goal 7)’을 실천하기 위해 뭉쳤다. 이는 감당할 수 있고, 신뢰할 수 있으며 지속 가능한 에너지 시스템을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구체적인 실천 과제는 에너지 효율을 높여 4인 가구 기준 매년 835㎏의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이거나 제품의 납 함량을 0.25% 미만으로 낮추는 것 등이다.
특히 최근 강화되는 친환경 기조에 따라 이들 기업은 전체적으로 그린 에너지 자원 도입을 높이고 탄소중립을 실현하는 데도 주력하고 있다. 여기에 활용되는 기술은 ▷엄격하게 필요한 경우만 온수가 제공되는 시스템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으로 물과 에너지 사용을 조절할 수 있는 시스템 등이다.
욕실 가구 기업들 친환경 제품 앞장서
이 밖에 욕실 제품 소재의 재활용 및 재사용 등도 화두였다. 이미 2050년에는 바다에 있는 플라스틱의 총무게가 물고기의 무게보다 더 커질 것이라는 경고도 나왔다. 이에 욕실 가구 기업들은 샤워실에 100% 재활용 가능한 유리와 알루미늄 소재를 채택하고, 미끄럼 방지 플레이트도 재활용된 페트병으로 만들었다.
파빌리온10에서 Under the Surface 조형물과 국제 욕실 가구 기업들의 전시품을 본 관람객들은 물과 에너지 절약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고 전했다. 한 관람객은 “화려한 디자인 전시를 예상했지만, 작품이 제시하는 심오한 메시지와 인류 난제를 풀기 위한 기업들의 노력을 접하면서 단순 디자인에 머물지 않고 대안을 제시하는 디자인의 중요성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디자인 위크 내(內) 가구 전시회인 ‘Salone del Mobile.Milano’의 회장 Maria Porro는 “Under the Surface 프로젝트를 통해 오늘날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우리의 일순간 선택이 미래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깊이 되새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 본 콘텐츠는 헤럴드경제 산업부 재계팀장 정태일 기자의 기고를 받아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