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제작된 영화 ‘승부’가 최근 주연배우의 논란 속에서 우여곡절 끝에 개봉하면서, 조훈현 국수와 이창호 국수가 한동안 화제의 중심에 설 것으로 보인다.
바둑기사의 호칭은 흔히 기사, 단, 선수, 사범 여러가지로 불리고 있지만 ‘국수’라는 칭호가 아마 가장 명예스러운 호칭이 아닐까 싶다. 바둑계에서 ‘국수’라는 호칭은 단순한 타이틀을 넘어 깊은 의미와 존경의 상징이다. 국수전이라는 바둑대회의 타이틀자를 국수라고 호칭하는 것인데, 조훈현과 이창호 두 선수가 국수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것은 그들의 탁월한 기량과 대한민국 바둑계에서의 위상을 보여준다. 그것은 단순 국수전 타이틀자가 아닌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바둑기사로 인정하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특히 2008년 한국바둑리그에서 Kixx팀(현재 GS칼텍스팀)이 두 국수를 1, 3지명으로 동시에 보유했다는 사실은 흥미로운 역사적 에피소드다.

Kixx팀은 2006년 한국바둑리그 참가와 동시에 우승을 차지했다. 그 다음해인 2007년 매일유업팀이 해체되면서 주장이었던 이창호 국수가 풀리게 되자, 우승의 주역 최철한 9단 대신 이창호 국수를 과감하게 선발했다. 2008년에는 조훈현 국수를 3지명으로 선발하면서 이 두 사제를 동시에 선수로 보유하게 되었다.
당시 두 국수는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선수단이 음식점에 가도 사인과 사진 촬영 요청이 쇄도해 식사하기조차 불편할 정도였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이 두 거목을 보유한 Kixx팀의 성적은 과연 어떠했을까?

Kixx팀은 4패끝에 첫 승을 거둘 정도로 부진했고, 팀 역사상 8개 팀 중 최하위를 기록하며 이른바 ‘최철한의 저주’라 불리게 되었다. 2006년도의 우승팀이 이창호 국수를 주장으로 영입한 2007년에 8개팀 중 7위, 2008년에는 꼴찌를 하였으니 그렇게 보일 수도 있었을 것 같다. 그러나 2009년에 현재의 한국기원 사무총장인 양재호 9단으로 감독을 교체하고, 한창 성장가도를 달리던 박정환 9단을 2지명으로 선발하면서 이창호 국수의 주장 마지막 해를 3위로 마무리했다.
비록 아쉬운 성적이었지만, 바둑계를 상징하는 두 거장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해였다. 영화 ‘승부’의 경우 예고편만 봤지만, 극 중 이창호 국수의 성격은 영화의 재미를 위해 각색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는 매우 점잖고 예의 바르며 말이 적은 인물이다.
흥미로운 일화로 조훈현 국수의 따님(당시 이화여대 대학원생)이 가끔 대국장에 응원 차 방문했을 때, 이창호 국수에게 열 마디 걸면 한두 마디 단답형으로 답하곤 했다. 이에 지금은 해설자로 맹활약하고 있는 송태곤 9단이 보다 못해 대신 따님과 어울려 놀아주었던 기억이 있다. 함께 한집에서 가족과 다같이 지냈으니 일상적인 오누이의 모습이랄까. 마치 한 가족 같은 일상적인 모습이었다.
조훈현 국수는 이창호 국수가 독립한 이후 주변의 강력한 권유로 김지석 9단을 다음 내제자로 받으려 했으나, 부인의 반대로 얼마 못 가 취소되었다. 바둑계에서는 김지석 9단이 말썽쟁이가 아닌, 이창호 국수가 또래보다 지나치게 어른스러웠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김지석 9단은 2014년부터 2019년까지 6년동안 Kixx팀 최장수 주장으로 활약하게 됐다. 그 역시 조용하고 사려 깊은 성격이었는데, 어렸을 때 조훈현 국수집에서 쫓겨난 경험에 대해 “난 평범한 아이였는데 이국수가 워낙 어른스러운 탓에 기준이 높아져서 그렇다”며 농담조로 억울해 했던 기억이 있다.
조훈현 국수와 이창호 국수, 이 두 사제지간은 바둑을 잘 둔다는 점 외에는 성격이나 기풍 등 공통점이 거의 없다. 조훈현 국수는 ‘물찬 제비’라는 별명 답게 빠르고 공격적이며, 자신의 돌은 최대한 살려내고 상대방의 대마는 용서 없이 잡아 대승을 거두는 스타일이다. 반면 이창호 국수는 ‘돌부처’라는 별명처럼 느리고 딱 승리할 만큼만 취하며 물러나는 스타일로, 실수가 거의 없어 이기기 힘든 선수다. 마치 창과 방패 같은 대비되는 성향이라고 할 수 있다.
조훈현 국수는 이창호 국수에게 단순히 길만 제시했을 뿐, 직접적인 훈련이나 야단을 치지 않았다고 한다. 온전히 스스로 잘 성장할 수 있도록 두었고, 이는 두 사람의 기풍과 더불어 독특한 사제관계를 잘 보여준다.

AI의 급격한 발전과 온라인 기술의 발달로 전 세계 바둑 대국이 실시간으로 공유되는 현시대에 이처럼 낭만 가득하고 역사적인 사제관계는 점점 사라질 것 같아 못내 아쉽다. 두 국수의 관계는 단순한 스승과 제자를 넘어 한국 바둑의 한 시대를 상징하는 특별한 인연이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