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 안중근의 독립정신을 독립서체에 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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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 안중근의 독립정신을 독립서체에 담다

GS칼텍스, 독립운동가 손글씨 서체를 만들다

GS칼텍스는 독립서체 1차 캠페인을 통해 삼일절 100주년을 기념하여, 독립운동가 윤봉길 서체와 한용운 서체를 개발/무료 배포하였고, 독립서체 2차 캠페인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백범 김구 서체와 윤동주 서체(별 헤는 밤 & 서시 두 가지 버전)를 개발하여 무료 배포하였습니다. 이번 독립서체 3차 캠페인으로 광복절을 맞이하여, 동양 평화를 기원하며 순국한 영웅 안중근의 서체를 무료배포 합니다. GS칼텍스가 지속적으로 독립서체 캠페인을 진행하는 이유는 독립운동가의 필체를 디지털로 복원하여 독립운동가분들의 정신과 독립운동의 위대함을 계승하고자 함입니다. 독립운동가분들의 정신과 마음이 담긴 글씨체를 다운받아 직접 사용해보며, 무엇보다도 나라를 위했던 숭고한 희생정신과 아름다운 마음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보시길 바랍니다.
1909년 국권 회복을 위해 만주 하얼빈에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순국한 독립운동가

독립서체 안중근

도마 안중근(1879~1910) │ 그날의 총성, 조국의 불씨가 되다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역에서 제국주의 침략의 상징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며 조국독립에 대한 민족의 열망을 만방에 알렸습니다. 일제의 부당한 판결을 받고 뤼순 감옥에서 『동양평화론』을 저술하던 중, 1910년 3월 26일 순국하셨습니다. 인류의 보편적 가치와 행복을 추구하고자 했던 안 의사의 동양평화론은 그가 국권회복운동을 하며 세운 지표로서 독립운동의 기초 배경이 되었고, 후세를 사는 우리에게까지 값진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영웅 안중근의 독립정신을 독립서체에 담다 | the energy of independence fighters ajg 03 1

독립운동가 안중근의사

독립운동가 안중근(安重根, 1879년 9월 2일 ~ 1910년 3월 26일)
한말의 독립운동가로 삼흥학교(三興學校)를 세우는 등 인재양성에 힘썼으며, 만주 하얼빈에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하고 순국하였다. 사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안중근은 황해도 해주목에서 진해 현감 안인수의 아들 진사 안태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날 때 등에 검은 점이 7개가 있어서 북두칠성의 기운으로 응하여 태어났다는 뜻으로 어릴 때에는 응칠(應七)로 불렸다. 독립서체 안중근 제작에 참고한 ‘장부가’에도 안응칠로 명기되어 있다.

안중근의 할아버지 안인수와 아버지 안태훈은 황해도 해주에서 이름난 명문 가문 출신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환경 속에서 결혼도 일찍 하여 행복한 가정을 꾸려 살아갈 수 있었지만, 안중근은 안락한 삶을 버리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제 발로 가시밭길을 걸어 들어갔다.
1904년 홀로 평양에 나와 석탄상을 경영하고 이듬해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는 것을 보자 상점을 팔아 1906년 그 돈으로 삼흥학교[三興學校;후에 오학교(五學校)로 개칭]를 세우고, 이어 남포(南浦)의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하여 인재양성에 힘썼다. 그러나 국운(國運)이 극도로 기울자 합법적인 방법으로는 나라를 바로세울 수 없다고 판단하여, 1907년 연해주(沿海州)로 가서 의병운동에 참가하였다.

1909년 동지 11명과 죽음으로써 구국투쟁을 벌일 것을 손가락을 끊어 맹세하고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결성하였다. 그 해 10월 26일 일본인으로 가장, 하얼빈 역에 잠입하여 역 플랫폼에서 러시아군의 군례를 받는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 타이지로, 만철 이사 다나카 세이타로 등에게 중상을 입히고 현장에서 러시아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당시 러시아군에 의해 체포될 때 의사는 러시아말로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연호하였다고 한다.

“사형이 되거든 당당하게 죽음을 택해서 속히 하느님 앞으로 가라”는 모친 조마리아 여사의 말에 따라 의사는 이후 공소도 포기한 채, 여순감옥에서 [안응칠역사]와 [동양평화론]의 저술에만 심혈을 쏟았다. [안응칠역사]는 의사의 자서전이고, [동양평화론]은 거사의 이유를 밝힌 것이었다.
결국 1910년 2월 14일에 사형 선고를 받았고, 이후 3월 26일 오전 10시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했다. 이 때가 그의 나이 32세였다. 그는 유언으로 자신의 유해를 하얼빈 공원에 묻었다가 고국이 해방되면 그때 고국의 땅에 묻어달라는 말을 남겼다. 정부에서는 안중근 의사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안중근은 항일 활동가 중에서도 첫번째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인지도 또한 매우 높다. 높은 애국심과 의거 이후에도 성인(聖人)의 자세를 가지고 일제의 유혹을 뿌리친 영웅 안중근은 몸과 마음을 바쳐 나라를 사랑했던 진정한 애국자이다.

<출처: 위키 백과, 나무위키, 두산백과, (주)항일독립선열선양단체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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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안중근의사 독립서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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