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2000년대 초반 벌어진 ‘세녹스’ 사태가 그랬다. 세녹스를 ‘가짜휘발유(당시 명칭 유사 휘발유)’로 정의한 정부 그리고 ‘석유대체연료’라고 주장한 제조사간의 법정 공방에서 정부가 이겼고 석유사업법이 개정되면서 세녹스 흔적은 사라졌다. 그 과정에서 ‘석유대체연료’라는 법적 용어가 신설되고 법 명칭이 바뀌는 계기가 마련됐다. 석유제품만 정의하면 되던 시절, ‘석유사업법’으로 충분했는데 석유를 대체하겠다는 유사 석유가 등장하면서 ‘석유 및 대체 연료 사업법’으로 법 이름도 바뀌었다.
양화를 꿈꾸던 악화 ‘세녹스’가 남긴 흔적을 되짚어 본다.
900원 휘발유, 그 뒤에 숨겨진 탐욕
실제로 2002년, 900원대 휘발유가 등장해 화제를 끌었다. 당시 휘발유 소비자 가격은 현재와 비슷한 1,300원대. 20여 년 전 물가를 감안하면 당시 휘발유 가격에 대한 소비자 부담은 컸다. 국제유가가 배럴당 30불을 넘어서자 정부는 국무회의를 열어 ‘고유가 시대 국민 불안 해소를 위한 비상경제 운영계획’ 수립에 나설 정도였다. 2010년대 초반 국제유가가 1배럴에 120불을 넘어섰던 시절과 비교하면 가소로운 수준이지만 2000년대 초반만 해도 30불대 유가는 정부와 산업계, 국민들에게 충격 그 자체였다.
그러던 차에 시중 가격 보다 약 30% 낮은 알콜휘발유가 등장하면서 소비자들은 환호했다. 하지만 그 실체는 유가가 급등하던 절묘한 시점에 합법을 가정해 등장한 기가 막힌 대국민 사기극으로 종결됐다. 심지어 이 제품을 유사 석유로 규정하고 단속한 석유사업법이 위헌이라며 헌법 소원까지 제기한 집요함의 극치였다. 그런데 그 뒤에 숨겨진 탐욕의 출발점은 ‘세금’이었다.
유사 석유 판매 주유소까지 등장
세녹스 제조사는 전용 판매점 모집에 나섰고 실제로 전국적으로 수십여곳의 주유소까지 등장했다. 하지만 세녹스는 석유화학 제품들의 조합물에 불과했다. 시중에서 흔히 구입할 수 있는 솔벤트 60%, 톨루엔 등이 30%, 메틸알콜이 10% 정도 섞인 조합물로 판명됐는데 제조사 측은 세녹스가 석유제품을 대체할 수 있는 신개념 알콜연료라고 주장했다.
솔벤트(solvent)는 흔히 신나로 불리는 유기용제인 시너(thinner)를 말하는데 석유처럼 유류세 부과 대상이 아니고 시중에서 흔히 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톨루엔(Toluen) 역시 유기용제의 일종이고 세녹스를 알콜연료로 칭한 이유가 됐던 메틸알콜은 대표적인 발암물질인 메탄올의 다른 이름이다. 이들 석유화학제품 혼합물을 주입해도 휘발유 자동차가 구동돼 연료로 사용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석유사업법에서 규정하는 정품 석유제품의 품질기준을 크게 벗어나 유사 석유제품인 것이 맞다.
이 제품 제조사가 세녹스를 석유대체연료라고 주장했던 배경도 법에 규정된 정품 석유 품질을 충족할 수 없었던 점을 노린 결과였다.
첨가제로 둔갑, 사실상 연료처럼 판매
정부가 석유사업법을 위반한 유사 석유제품으로 규정하고 단속에 나서자 이번에는 자동차용 첨가제로 용도를 전환해 판매하는 치밀함도 보였다. 그런데 이 첨가제가 더 문제가 됐던 것이 플라스틱 용기 등에 담겨 길거리에서 휘발유 대용으로 불티나게 판매되는 또 다른 편법의 길을 열었다는 점이다.
세녹스 제조사는 환경부 산하 국립환경연구원에서 첨가제 인증을 받아 자동차 엔진 성능 개선 효과를 내세운 유명 제품 ‘00원샷’ 등과 마찬가지로 공식 판매될 수 있는 법적 요건을 확보했다. 하지만 꼼수가 있었다. 당시 대기환경보전법에서 규정한 첨가제의 정의는 ‘자동차 연료에 소량 첨가해 자동차 성능을 향상시키거나 배출물질을 저감시키는 화학물질’로 규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소량’이 문제였다. 얼마까지가 ‘소량’인지에 대한 규정이 없던 당시, 세녹스는 휘발유에 40%까지 혼합되며 팔렸다. 석유처럼 유류세도 부과받지 않았다. 더 큰 문제는 첨가제 유통에 대한 법적 규정이 없어 노점이나 트럭, 봉고차 등에 세녹스를 싣고 길거리 등에서 소비자에게 판매하는 일이 벌어졌다는 점이다. 발화점이 높아 폭발은 물론이고 대기와 토양을 오염시킬 수 있는 위험물이 플라스틱 용기 등에 담겨 길거리에서 자동차에 주입됐고 심지어 아파트 등 공동 주택 주차장에 배달 판매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LP-Power, ING 같은 세녹스 아류 제품들도 잇따라 출시되며 활개를 쳤다.
세금 정상 부과되면 가격 경쟁력 없어
석유대체연료 또는 첨가제인가 아니면 유사 석유제품인가를 놓고 정부와 제조·판매사간 고소·고발로 확산됐고 위헌 소송까지 제기되는 험난하고 험악한 과정을 거쳤다. 지난한 과정 끝에 결국 정부의 손이 올라갔지만 지나 놓고 보니 세녹스 사태의 핵심은 의외로 간단했다. 자본주의 시장에서 경제활동의 가장 큰 동기는 ‘돈’ 즉 ‘이익’인데 세녹스는 ‘세금’에서 불법 행위의 동기를 부여받았다. 석유제품인 휘발유는 소비자가격 중 60% 넘는 유류세가 부과된다.
그런데 유사 석유 원료로 사용될 수 있는 석유화학제품은 유류세 부과 대상에 해당되지 않아 불법으로 전용되면 막대한 부당 이득을 남길 수 있다. 2003년 당시 산업자원부가 발표한 보도자료에서는 세녹스 제조사의 부당한 의도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휘발유 소비자가격이 리터당 1,300원이면 정유사 출하가격이 350원 정도, 교통세 등 내국세가 860원 정도, 대리점과 주유소의 마진이 합쳐 100원 정도 된다. 세금이 출하 가격의 250% 정도가 된다. 누구나 탈세의 유혹을 느낄 수 있다.’
고율의 유류세가 탈세를 노린 가짜휘발유 제조, 유통 동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정부도 인정한 셈이다.
‘조세 부과로 비싸진 휘발유 가격에 대한 일반 국민들의 저항 심리를 이용하고, 이에 동조하는 언론을 활용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그러나 탈세 행위를 전제하지 않으면 이 기업(세녹스 제조기업)은 근본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유류세가 정상적으로 부과되면 세녹스는 정품 석유보다 더 비싸져 유통 경로를 열어줘도 소비자들이 선택하지 않을 것이라고 해석한 대목이다.
휘발유보다 출하 가격 높지만, 소비자가격이 낮은 마법의 비결
세녹스 소매상들은 최종 소비자에게 리터당 990원 선에서 판매했다. 정품 휘발유가 1,300원에 판매된 것을 감안하면 24% 정도 낮은 가격에 공급됐다. 정유사 휘발유보다 공장도 가격은 두 배 정도 높았는데 정작 소비자 가격은 70% 선에 형성됐던 마법 같은 일은 ‘세금’ 때문에 가능했다. 정유사 출하 시점에 소비자 가격의 60%에 달하는 유류세를 부과받는 정품 휘발유와 달리 세녹스 같은 가짜 석유는 유류세를 탈루하며 발생하는 부당이득을 제조·유통 단계는 물론이고 소비자들과 나눠 가지며 스스로를 ‘정당화’시켰다.
이 대목에서 주목할 것 중 하나가 ‘소비자의 선택’이다. 소비자들은 ‘값이 싸다’는 이유 하나로 연료 첨가제에 현혹됐지만, 그 결과로 다양한 위험과 부담을 감수해야 했다.
소비자 선택, 불법 동기 끊을 수 있다
메탄올이나 톨루엔 같은 유해 석유화학 물질이 다량 혼합된 불법 석유제품에 장기간 노출되면 운전자의 건강은 물론 차량의 정상적인 작동을 위협하는 살인 무기가 될 수 있는 셈이다. 정부는 막대한 세수 결손을 겪게 됐다. 첨가제형 불법 석유제품이 여전히 기승을 부리던 2006년 당시 유사 석유 법정단속기관인 한국석유품질관리원(현 한국석유관리원)은 당시 국내 휘발유 소비량 중 11% 정도가 가짜 석유로 유통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또한, 유류 세금이 부과되지 않는 석유화학제품을 원료로 제조된 가짜휘발유 유통이 늘면서 정부가 약 1조 원에 달하는 세수 손실을 입는 것으로 추산했다. 연료비용을 아끼겠다며 소비자들은 가짜 석유를 선택했는데 그 과정에서 건강과 차량 안전을 위협받았고 탈루된 세금은 다시 국민 세금으로 채워져야 했으니 주머니 쌈짓돈을 아낀 것이 결국은 아낀 것이 아닌 셈이 됐다. 법의 허점을 노려 악화로 양화를 구축하려던 시도는 법의 방패로 막는 데 성공했지만 결국은 소비자의 선택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20년 현재, 난방 연료인 등유를 수송 연료인 경유에 불법 혼합해 유통시키거나 자발적으로 소비하는 불법 행위가 여전히 심심치 않게 벌어지고 있다. 가짜 석유 불법 제조와 유통은 정부가 법과 단속으로 최소화할 수 있지만, 소비자의 자발적인 선택까지 완벽하게 차단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뜬금없이 2000년대 초반 세녹스 사태의 기억을 끄집어내는 것은 소비자들이 선택하지 않으면 불법의 동기가 희미해질 수 있다는 점, 소비자가 불법을 선택하는 것이 궁극에는 소비자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이다.
김신 - 에너지플랫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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