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수출국기구 OPEC(Organization of the Petroleum Exporting Countries)에 비OPEC 산유국까지 힘을 보태면서 카르텔의 파워는 더욱 강력해지고 있다. 생산량을 조절해 유가를 조절하는 영향력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고 있는데 비OPEC 산유국까지 가세하면서 칼날의 기세는 더욱 날카로워 지고 있다. 이미 하루 200만 배럴의 감산을 시행중인 상황에서 5월을 기해 생산량을 추가로 줄이겠다고 선언하며 떨어지는 유가를 부양하려 시도하고 있다. 더 우려스러운 점은 글로벌 탈탄소 패러다임 속에서 OPEC+ 카르텔의 석유 수급 장악력이 더 커질 수 있다는 점인데 그 배경을 알아 본다.
원유 시장 스윙 프로듀서들의 폭력적 선언
장관급 정례회의를 하루 앞둔 지난 4월 2일, OPEC+는 추가 감산을 전격 발표했다. 5월 이후 하루 116만 배럴을 감산하겠다고 밝혔는데 세계 최대 산유국 중 하나인 사우디가 앞장섰다. 주목할 대목은 ‘추가적인 감산’에 합의했다는 점이다. OPEC+는 이미 하루 200만 배럴의 감산 조치를 시행중으로 올해 연말까지 적용된다.
그런데 사우디는 5월 이후 하루 50만 배럴의 생산을 ‘추가적’으로 줄이겠다고 선언했고 이라크, UAE, 쿠웨이트, 알제리, 가봉, 카자흐스탄, 오만 등 주요 산유국들이 감산에 동참했다. 카르텔인 OPEC+에서 감산 쿼터를 부여하는 대신 회원국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했다’는 점도 실행력의 무게감을 키우고 있다. 미국, 유럽 주도 경제 제재에 역대응하며 3월 이후 6월까지 하루 50만 배럴을 감산하겠다고 선언한 러시아까지 합세해 해당 조치를 연말까지 연장하겠다고 밝혔다.
국제 석유시장의 ‘스윙 프로듀서(swing producer)’ 역할을 하는 산유국들이 감산에 적극 동참중인 모양새인데 기실행중인 하루 200만 배럴에 더해 5월 이후 OPEC+의 116만 배럴 추가 감산 그리고 러시아의 감산 기한 연장으로 50만 배럴이 보태 지면서 올해 하반기 감산 규모는 365만 배럴에 달하게 된다. 세계 석유 수요의 3.7%에 해당되는 물량을 덜 공급하겠다는 OPEC+ 결정은 석유 소비국 입장에서는 가히 ‘폭력적인 선언’으로 받아 들여지고 있다.
감산 주도 사우디·러시아 모두 미국과 반목 중
이번 결정은 OPEC을 주도하는 사우디와 비OPEC 산유국을 대표하는 러시아의 이해 관계가 맞아 떨어진 결과라는 분석이 유력하다. 지난 3월 미국의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 유럽 크레딧스위스(CS) 사태 등 글로벌 금융 불안이 확산됐고 세계 경기 침체 장기화로 석유 수요 둔화 가능성이 커지면서 국제유가는 하락양상을 보여왔다.
이 같은 상황은 600조원이 넘는 자금이 필요한 네옴(NEOM) 프로젝트를 비롯해 탈석유 프로젝트를 추진중인 사우디의 재정적 동력을 약화시키고 우크라이나와 전쟁 중인 러시아에게는재정 압박을 가중시킨다는 점에서 양국 모두 유가 부양 정책이 필요했다는 분석이다. 전통적인 우방으로 해석되던 미국과 사우디간 갈등도 추가 감산 결정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읽힌다.
지난 해 7월 미국 바이든 대통령이 유가 안정을 위한 증산을 주문하기 위해 직접 사우디를 방문하고 빈 살만 왕세자 등을 만났지만 OPEC+의 증산을 이끌어 내지 못했다. 오히려 빈살만 왕세자는 당시의 유가 상승과 인플레이션의 원인이 서방이 주도하는 무리한 탄소중립 정책 때문이라며 바이든 대통령과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이번의 5월 추가 감산을 주도한 사우디는 그 배경에 대해 ‘석유 시장 안정을 위한 예방적 조치’라고 밝혔고 미국 정부는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OPEC+의 추가 감산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불만을 내비치며 갈등의 골은 더 깊어지고 있다.
사우디는 한 발 더 나아가 중국이 주도하는 정치·경제·안보 협의체인 상하이협력기구(SCO)에 합류했고 중국 중재로 이란과의 관계 정상화에도 합의했으며 페트로 달러 위상을 흔들 수 있는 위안화 결제를 확대하는 등 미국 바이든 행정부에 대한 정치 외교적 압박 강도를 높이고 있다. 그나마 소비국 입장에서 다행인 점은 추가 증산이 유가 상승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일부 시장 전망이다.
OPEC+ 추가 감산 발표 이후 골드만 삭스는 올해 말 평균 유가를 기존 전망 보다 배럴당 5불 높인 95불로 상향했다. 반면 시티그룹, JP Morgan, BOA(Bank of America)는 기존 유가 전망을 유지했다. 모건 스탠리는 OPEC+ 감산은 향후 몇 달간 석유 수요가 부진할 수 있음을 인정한 것이라고 평가하고 오히려 올해 잔여 분기 유가 전망을 배럴당 5~7.5불 하향 조정하기도 했다.
석유 수출이 국가 재정에서 절대적인 나라들의 카르텔
전 세계적으로 원유가 생산되는 나라는 100 여개 국가에 달한다. 현재는 고갈됐지만 동해가스전에서 초경질원유인 컨덴세이트가 생산되면서 우리나라도 얼마 전까지 세계 95번째 산유국에 랭크된 바 있다. 그렇다고 모든 산유국이 석유를 수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수출할 수 있을 만큼의 석유가 생산되느냐가 중요한데 안타깝게도 현재 우리나라는 산유국 맥이 끊겼다.
세계 원유 공급량의 10% 수준인 하루 1,000만 배럴이 넘는 원유를 생산하고 있지만 동시에 세계 최대 석유 소비국인 미국 역시 지난 2016년까지는 석유 순수입국이었다. 셰일오일 생산 기술의 진화로 현재는 석유를 수출하고 있지만 OPEC+ 카르텔의 감산으로 치솟는 글로벌 유가 충격을 방어하기 위해 전략비축유를 방출하는 등 에너지 소비국을 대표하는 위치가 미국에게 더 잘 어울린다.
반면 ‘석유수출국기구’라는 명칭에서 보여지듯 OPEC은 ‘소비자에게 효율적이고 경제적이며 정기적인 석유 공급을, 스스로에게는 안정적인 수입을 보장하는 것’이 설립 목적이다.(OPEC Misson : an efficient, economic and regular supply of petroleum to consumers, a steady income to producers) 사우디를 비롯한 중동 산유국들은 석유 수출로 벌어 들이는 안정적인 ‘오일 머니(Oil Money)’로 막대한 국부를 축적하고 있다.
코트라 자료에 따르면 비OPEC 산유국의 리더격인 러시아의 가장 큰 수출 품목은 1위가 석유, 2위가 석탄, 3위가 천연가스로 평가될 정도로 국가 재정에서 에너지가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이다. 석유수출국기구 OPEC과 비OPEC 산유국이 모여 OPEC+라는 더욱 강력한 카르텔을 구축하고 세계 석유 수급 설계의 장악력을 높이려는 궁극적인 배경이 ‘꾸준한 재정 수입(steady income)’을 가리키고 있다.
세계 석유 공급 1/3로 수급 퍼즐 맞추는 OPEC
사실 세계 석유 공급의 2/3 정도는 비OPEC 산유국이 담당하고 있다. 하루 1억 배럴 규모의 세계 석유 수요 중 비OPEC 산유국 비중은 6,600∼6,700만 배럴에 달한다. 뒤집어 보면 석유수출국기구 OPEC 점유율이 생각만큼 높지 않다. 하지만 세계 석유 수급이라는 ‘퍼즐’을 완성하는 마지막 몇 조각을 활용해 OPEC을 비롯한 카르텔 산유국들은 때로는 심각한 수급 불안을 또 때로는 극심한 가격 변동성을 유발하고 있다. 2000년대 들어서도 국제 석유 시장은 매우 극단적인 변동을 경험중이다.
2008년 배럴당 130불을 넘던 두바이유 가격은 불과 수개월 만에 40불대까지 급락했고 2011년 이후 4년 가까이 100불대를 유지하던 유가는 2016년에는 20불대까지 추락했다. 2008년의 고유가는 달러화 약세와 그로 인한 투기 자금 유입이 한 요인을 제공했지만 OPEC 산유국들의 공급 부족이 더 큰 영향을 미쳤다. 팬데믹이 끝을 보이면서 전 세계적인 석유 수요 회복과 OPEC+ 감산 영향 등으로 지난 해 6 두바이유 가격은 113.27불까지 치솟았다.
그렇다고 OPEC 산유국들이 국제유가를 완벽하게 장악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발 금융위기 영향으로 전 세계적으로 경기침체가 심화되고 석유 수요 감소 우려가 커지면서 2009년 국제유가는 급락했고 코로나19라는 재앙으로 2020년 4월 두바이유 가격은 배럴당 20불대까지 떨어지기도 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유가 급등의 중심에는 OPEC+ 카르텔이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다.
OPEC+는 이번 5월의 추가 감산 배경으로 ‘시장 안정’을 제시하고 있다. 석유 소비국 입장에서 ‘시장 안정’은 ‘수급’을 의미할 텐데 OPEC+는 ‘자신들이 판매하는 석유 가격 안정’ 즉 ‘가격 하락의 방지’를 염두에 두고 있을테니 양 측의 입장을 평행선을 달릴 수 밖에 없다.
OPEC+ 카르텔 장악력, 갈수록 더 강화된다는데…
20년 넘게 사우디 석유장관을 지내며 OPEC을 이끌었던 ‘석유 왕’ 야마니의 ‘석기시대는 돌이 없어서 끝난 것이 아니다’는 어록은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다. 막대한 매장량을 등에 업은 중동 산유국들이 원유 수출을 중단하며 자원의 무기화를 처음 시도한 것이 1973년의 제1차 오일쇼크이고 당시의 석유 금수 조치를 이끈 장본인이 야마니 장관이다.
그런 야마니 장관은 석기시대를 비유해 석유시대의 종말을 예고했는데 실제로 석유를 대체할 에너지 기술 진화가 속도를 내면서 탈화석연료 청사진이 구체화되고 있다. 한때 원유 소비 증가로 매장량이 정점에 다다랐다는 이른 바 ‘피크 오일(Peak Oil)’이 주목을 받았지만 새로운 유전 개발과 셰일오일 등 비전통자원 개발 기술 등이 진화하면서 석유 가채연수(可採年數)는 오히려 늘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언젠가 석유의 종말이 온다면 피크오일 때문은 아니며 전 세계적인 탈탄소 패러다임으로 자연스럽게 석유가 외면받는 시나리오가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 이번 5월 추가 감산 결정의 배경으로 시장 전문가들은 ‘세계 경기 침체에 따른 석유 수요 둔화, 러시아산 석유 금수 조치의 제한적인 효과, 미국의 전략비축유(SPR) 정책에 대한 사우디의 불만’ 등을 꼽고 있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속내는 ‘탈탄소로의 전환에 앞서 석유 카르텔의 힘을 결집해 유가를 떠받치고 더 많은 오일머니로 국가 재정을 채우겠다’는 의도가 깔려 있어 보인다. 석유 소비국 입장에서 두려운 것은 석유 입지가 갈수록 좁아지는 상황에서 OPEC+ 카르텔 폭력의 수위는 더 거세질 수 있다는 점이다.
글로벌 에너지 기업인 BP는 ‘BP Energy Outlook 2023’에서 OPEC은 비OPEC 산유국의 공급 증가에 대응해 첫 10년 동안은 생산량을 낮춘 후 글로벌 석유 수요 감소와 공급 시장 경쟁 약화 등의 환경 변화를 활용해 시장 점유율을 높여가는 전략을 취할 것으로 전망했다.
BP는 OPEC의 석유 점유율이 2019년 35%에서 2050년에는 49~63%까지 확대될 것으로 내다봤다. 실제로도 미국을 비롯한 환경 선진 산유국들은 탈탄소 기조에 맞춰 석유를 비롯한 화석 자원 탐사와 개발, 생산을 제한하고 있어 석유 수출로 먹고 사는 산유국들의 과점 체제는 더욱 공고해질테니 에너지 안보와 가격을 OPEC+ 카르텔에 맡겨야 하는 석유 소비국의 입지는 더욱 위태로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