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 분쟁으로 중동지역의 지정학적 위기가 고조되던 지난 10월, 국회 국정감사에서는 유가 급등과 석유 수급 위기 대응 방안이 집중 질의됐다. 이 자리에서 산업통상자원부 방문규 장관은 “정부와 민간이 약 8개월 분의 원유를 확보한 상황으로 일시적인 시장 요동에는 대응할 여력이 있으며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 대응책을 꼼꼼히 마련하겠다”고 답변했다.
국제에너지기구 IEA는 우리나라 석유 안보의 핵심을 ‘석유 비축’으로 평가했다. 지난 10월 윤석열 대통령의 사우디 국빈 방문과 관련해 석유공사는 아람코와 원유 공동 비축 유지 계약을 맺었는데 석유 안보의 유용한 수단으로 해석되고 있다. 우리나라 석유 안보 정책의 핵심인 비축이 어떻게 계획되고 실행되는지 알아본다.
석유 소비국에게 석유 비축이란…
IEA는 지난 3월 발간한 한국석유안보정책(Korea Oil Security Policy) 리포트에서 ‘비상 석유 비축유의 활용은 한국의 비상 대응 핵심 정책(The use of emergency oil stocks is central to Korea’s emergency response policy)’이라고 진단했다. 구체적으로는 우리나라가 원유, 석유제품과 관련해 전략적, 상업적 매장량을 보유하고 있고 정부 비축시설 9곳을 운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석유공사를 통해 정부의 공적 비축유를 관리하고 있고 IEA가 권장하는 석유 비축 의무를 이행하며 산업계에 비축유 보유 의무를 부여하고 있다고도 덧붙였다.
IEA의 언급처럼 석유 비축은 우리나라의 매우 중요한 에너지 안보 수단 중 하나다. 석유, 가스에너지 전량을 수입에 의존하는 탓에 상시적으로 안보 리스크에 노출될 수밖에 없어 자연스럽게 비축이 중요한 방어 수단이 되고 있다. IEA가 우리나라 석유 안보 정책을 평가하는 이유는 산유국 카르텔인 OPEC에 대응해 에너지 소비국들이 뭉친 국제에너지기구의 가장 대표적인 역할이 비축을 통한 수급 안정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IEA는 스스로의 역할을 ‘석유 공급과 관련한 (산유국들의) 중대한 차질에 공동으로 대응해 석유 안보를 유지하기 위해 1974년에 설립됐다’고 설명하고 있다.
IEA가 설립된 1970년대는 두 차례에 걸친 오일쇼크(oil shock, 석유파동)가 발생했던 시기였다. 1973년 10월 6일 이집트와 시리아가 이스라엘을 공격하며 제4차 중동 전쟁이 발발했고 같은 해 중동 산유국 중심의 석유수출국기구 OPEC은 석유 수출을 제한하는 방식으로 미국과 이스라엘을 압박하며 제1차 오일쇼크가 발생했다. 이때 미국을 중심으로 OPEC에 대응해 석유 안보를 지키자며 에너지 소비국들이 모여 결성한 기구가 IEA로 우리나라도 가입되어 있다.
현재의 IEA는 석유 안보 이외에도 에너지의 효율적 사용, 청정에너지 확대, 에너지 수요 관리, CCUS 등의 분야로 역할을 확장하고 있지만 여전히 석유 안보는 IEA의 핵심 역할 중 하나다. IEA는 ‘국제 에너지 프로그램 협정(the Agreement on an International Energy Programme)’에 근거해 석유 순수입량의 최소 90일에 해당하는 석유 재고를 보유하도록 회원국에게 의무를 부여하고 있고 우리나라도 그 수준을 충족하고 있다.
IEA 회원국들은 세계 석유 공급 차질 등에 공동 대응해 수급 불안을 해소시키는 역할도 하는데 이때 활용되는 것이 바로 전략비축유다. 전략비축유 방출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과정에서 급등한 국제유가와 수급 불안을 해소하는 수단으로도 주목을 받았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사태로 유럽 등을 중심으로 경유 부족이 심화되고 유가가 크게 오르는 상황이 지속되자 IEA는 회원국들과 두 차례에 걸쳐 전략비축유를 방출했다.
지난해 3월 1일 이사회를 열어 6,270만 배럴 규모의 비축유를 방출했고 4월에는 IEA 의장국인 미국의 제안으로 1억 2,000만 배럴의 비축유 추가 방출에도 합의했다. 그 과정에서 IEA 회원국인 우리나라도 총 1,165만 배럴의 전략비축유를 풀었다. 우리나라 하루 석유 소비량의 약 5일분에 해당되는 전략비축유를 방출하며 글로벌 석유 수급 불안과 유가 안정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전에도 우리나라는 1991년 걸프전, 2005년의 허리케인 카트리나 발생, 2011년 리비아 사태 등 글로벌 위기 상황 마다 전략비축유를 방출하며 국제 석유 수급에 일조했다.
한편 우리나라의 석유 비축량은 IEA 권고기준을 충족하는 것을 넘어서 주요국 보다 우월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석유공사에 따르면 IEA 기준 정부 비축 일수는 6월말 기준으로 일본이 117일분, 프랑스가 82일분, 독일이 95일분을 기록 중인데 우리나라는 이들 보다 높은 127일분에 달한다.
전국 9개 공적 비축기지에 9,580만 배럴 저장 중
정부는 ‘석유 및 석유대체연료사업법(이하 석유사업법)’을 통해 공공과 민간에게 석유 비축 의무를 부여하고 있다. 석유사업법에 따르면 석유 수급과 석유 가격 안정을 위해 석유비축목표와 비축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석유 비축 목표와 계획, 비축 석유의 종류 및 물량, 비축 시설 관련 규정 등이 명시되어 있다. 이를 근거로 공공 비축을 담당하는 석유공사는 원유는 물론이고 당장 사용할 수 있는 휘발유, 경유, LPG 같은 석유 완제품까지 비축 중이다.
석유공사는 전국적으로 9개 비축 기지를 운영중인데 이 중 4곳의 원유 보관 기지가 충남 서산, 전남 여수, 경남 거제 그리고 울산 등 정유사들이 위치한 전국 주요 거점에 분포되어 있다. 휘발유, 경유 등 즉각 사용할 수 있는 석유 완제품은 경기도 구리와 용인, 강원도 동해, 전남 곡성의 비축기지에 저장되며, 620만 배럴 규모의 저장 능력을 갖춘 LPG 비축기지도 평택에서 운용 중이다.
석유공사는 저장용량 1억 4,600만배럴 규모의 전국 9개 비축기지에서 9월 말 기준 9,580만 배럴의 원유와 석유제품이 저장되어 있다고 밝혔다. 정부는 석유사업법에 근거해 매년 공공 비축유 구매 목표를 설정, 고시하고 석유비축사업 출자 예산도 편성한다. 올해 고시에 따르면 정부 부문 비축유 확보 물량은 원유 47만 2,000배럴로 이중 정부 예산 출자로 36만 배럴의 원유를 확보하고 비축 대행 사업자인 석유공사가 자체 재원으로 11만 2,000배럴의 석유제품을 구매한다.
일반적으로 산업통상자원부 출자 예산으로는 원유를 구입하고 석유공사 자체 재원은 석유제품 위주로 비축유를 구매한다. 내년에는 공공 비축유 구매 물량이 90만 9,000배럴로 늘어난다. 이중 정부는 원유 가격이 배럴당 88.14불, 원달러 환율 1,301.0원을 기준으로 총 365억 4,500만원의 예산을 편성해 32만 배럴을 구매한다는 계획이다. 나머지 58만 9,000배럴은 석유공사 자체 재원으로 확보한다.
한편 정부는 주기적으로 중단기 비축계획을 수립중으로 현재는 ‘제4차 석유비축계획(2014~2025년)’을 적용받고 있다. 현재는 제5차 석유비축계획 수립 작업을 진행중인데 친환경 수소를 생산할 수 있는 암모니아를 비축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산유국 석유 유치해 저장 수수로 받고 석유 안보도 강화
지난 10월 사우디를 국빈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은 빈살만 왕세자와의 정상회담을 계기로 양국간 수소, 에너지 안보 협력을 강화하기로 합의했다. 이를 계기로 우리나라 에너지 유관 기관과 기업들은 사우디 측과 2건의 계약, 5건의 양해각서를 체결했는데 이 중에는 석유공사와 아람코가 맺은 원유 공동 비축 계약도 포함됐다.
‘국제 공동 비축 사업’은 산유국 원유를 우리나라에 유치해 저장 수수료 수입을 확보하는 동시에 석유 수급 위기 시 저장 원유를 우선 구매하는 권한을 갖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산유국 원유를 공동 비축하게 되면 정부 재정 부담을 줄이면서 비축 물량은 확대할 수 있어 1999년 이후 석유공사는 산유국과의 공동 비축 사업을 확대 중이다.
이번 계약으로 석유공사는 사우디 아람코 원유 530만 배럴을 울산 비축기지에 저장하게 된다. 우리나라 일일 원유 소비량의 이틀 분에 해당되는 원유를 우리 땅에 저장해 저장 수수료 수입을 올릴 수 있게 됐는데 동시에 석유 수급 위기에 우선 구매권을 확보해 에너지 안보 강화도 기대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석유공사는 아람코에서 국제 공동 비축 사업으로 유치한 원유 530만 배럴은 약 5,500억 원에 해당되는 가치로 그만큼의 원유 구입 정부 재정을 절약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아람코 입장에서도 동북아시아 중심 거점인 우리나라 항만에 자사 원유를 저장해 아시아 지역 고객사에게 신속하게 원유를 공급할 수 있는 거점을 확보했다는 의미가 있다.
이에 앞선 지난 1월에도 우리나라는 ‘한-UAE 국제 공동 비축 사업’을 체결하며 3년 동안 총 400만 배럴의 UAE 원유 비축을 유치했다. 당시 계약으로 석유공사는 3년 동안 1,440만 불의 비축기지 대여수익을 확보하는 동시에 우리나라가 우선 구매권을 행사할 수 있어 에너지 안보를 강화하는 계기로 평가받았고 실제로 3월에 UAE 아부다비 국영석유사(ADNOC) 원유 200만 배럴이 석유공사 여수 비축기지에 입고됐다.
민간 석유 사업자들의 저장 시설과 비축유도 국가 석유 안보에 기여하고 있다.
정유사를 포함한 석유 수출입 업체들은 법적으로 비축 의무를 부여받는다.
석유사업법 등에 따르면 석유비축의무자는 ‘석유 수급과 석유 가격 안정을 위해 석유를 비축’해야 한다.
대표적인 사업자가 정유사와 LPG 수입사들이다.
정유사는 직전 연도 연간 내수 판매량을 일 평균으로 산정해 40일분의 석유를 비축하도록 의무를 부여받고 있다.
LPG 수출입업체들은 액화석유가스사업법에 근거해 연간 일 평균 내수 판매량의 15일분에 해당되는 물량을 비축해야 한다.
이외에도 전국 1만 1,000여 주유소와 2,000여 LPG 충전소는 실생활 속의 석유 비축 공간 역할을 하고 있다.
민관 공동의 적극적인 비축 노력과 더불어 산유국 석유 자원을 유치하며 수익을 창출하는 창의적인 발상으로 자원 빈국인 우리나라의 에너지 안보가 강화될 수 있는 점은 매우 다행스럽다.
다만 현재 직면하고 있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 등으로 우려되는 에너지 위기 사태의 대응력을 더욱 높이려면 대륙붕 탐사나 해외 사업 참여를 확대해 자원 자주개발률을 높이는 등 보다 능동적인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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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 - 에너지플랫폼뉴스
전북대학교에서 독어독문학을 전공했다. 하지만 전공과는 상관없는 에너지 분야 전문 언론에서 20년 넘는 세월을 몸담고 있는 에너지 분야 전문 기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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