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입 물품에 부과되는 세금을 ‘관세(關稅, tariff)’라고 부른다. 일반적인 세금은 특정 분야에 투입될 국가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징수되는데 관세 성격은 다르다. 외국 수입 물품에 세금을 매겨 국내 관련 산업 경쟁력을 높이는 일종의 무역 장벽의 역할을 한다. 관세 성격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표현 중 하나가 ‘보복관세(報復關稅, retaliatory duties)’이다. ‘보복관세’는 자국 상품이 수입국에서 부당한 대우나 차별적인 관세로 불이익을 받을 경우 상대국 수입 제품에 고율의 세금을 매기는 행위를 말한다. 최근에는 기후 대응 능력이 관세 기능과 유사한 무역장벽 역할로 주목받고 있다. EU가 도입한 ‘탄소국경조정제도(이하 CBAM : Carbon Border Adjustment Mechanism)’나 미국의 ‘청정경쟁법안(이하 CCA : Clean Competition Act)’이 그렇다. 환경이 무역 장벽 역할을 하는 시대에서 탄소 저감은 생존의 필수 조건이 되고 있다.
지구온난화 명분 내세웠지만 무역 장벽 셈법도 깔려 있어
오는 2026년 이후 EU 국경을 넘어 수입되는 제품들은 탄소 누출량만큼의 비용을 지불하는 ‘탄소국경조정제도(CBAM)’가 적용된다. 2030년 온실가스 배출량을 1990년 대비 40% 감축한다는 당초 목표를 55%로 상향 조정한 EU는 구체적인 실행 수단으로 2021년 7월, ‘탄소감축법안 패키지’인 ‘Fit for 55’를 발표했는데 그중 하나가 ‘탄소국경조정제도(CBAM)’이다. EU 국경을 넘는 수입 제품의 탄소 배출량까지 규제하려는 데는 전 세계적인 ‘탄소 누출(Carbon Leakage)’을 방지하겠다는 환경 이념이 깔려 있지만, 그 기저에는 ‘경제적인 셈법’이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EU는 ‘탄소 배출권 거래제(Emissions Trading Schemes, ETS)’를 통해 회원국 내 탄소 배출 감축을 도모하고 있다. 하지만 이 제도는 EU 회원국 안에서 생산되는 제품의 탄소 배출만 규제하고 있어 전 세계적인 지구온난화 시계를 늦추는 데 한계가 뚜렷하다. EU 밖에서 생산되는 제품에는 탄소 배출 비용이 적용되지 않아 EU 기업들의 가격 경쟁력이 약화하는 문제도 발생한다. EU 기업들이 탄소 비용을 적용받지 않는 국가들로 제조시설을 이전하거나 확장하는 ‘오프쇼어링(off-shoring)’ 도 EU 입장에서는 경계해야 한다.이런 점을 고려해 EU 이사회는 국경을 넘는 수입 제품에도 EU 생산제품과 동일한 수준의 탄소비용을 부과하겠다는 내용을 담은 CBAM 법안을 지난 4월 25일 최종 승인했다. CBAM은 일단 철강, 알루미늄, 시멘트, 비료, 전력, 수소 등 6개 품목에 적용되는데 오는 10월 이후 준비 기간을 거쳐 2026년 1월 1일부터 본격 시행된다.
2026년 이전까지의 준비 기간 동안 EU는 CBAM 대상 품목의 탄소 배출량을 보고 받는다. CBAM이 본격 적용되는 2026년 이전까지의 과도 기간 동안 대상 품목 수출업자가 탄소배출량을 의무적으로 보고하도록 EU가 규정했기 때문이다. 2026년부터는 EU 수입업자가 도입 상품에 내재된 탄소배출량 만큼 CBAM 인증서를 구매해 EU에 제출해야 한다. EU에 수출되는 CBAM 대상 품목의 탄소 배출 비용이 발생하니 국경을 넘는 수입 제품에 ‘환경 관세’가 부과되는 것과 마찬가지의 부담을 지게 된다.
탄소 배출 가격은 어떻게 산정되나
‘배출권거래제도’는 정부에서 기업의 연간 온실가스 배출 허용 한도를 할당하고 그 기준에 모자라거나 넘치는 기업 사이에 배출권을 거래할 수 있도록 만든 제도이다. 정부는 ‘할당(割當, 나누어 줌)’을 통해 각 기업마다 한 해 동안 배출할 수 있는 온실가스의 한도를 부여하고 있다.
할당 기준 보다 온실가스를 많이 배출한 기업은 배출 범위보다 적게 배출한 기업에서 경매 등의 방식을 통해 배출권을 구매하는 방식으로 할당 기준을 맞추게 된다. 우리나라는 온실가스 감축을 위해 배출권거래제도를 도입 중인데 그 과정에서 지불하는 탄소 비용이 다행스럽게도 EU의 CBAM 운용 과정에 반영되는 방식으로 설계됐다. EU는 회원국 기업과의 차별이 발생하지 않도록 CBAM 대상 제품을 수출하는 국가에서 배출권거래제 등을 통해 탄소가격을 지불한 경우 그 비용을 인증서에서 감면하기로 했다.
철강을 예로 들면 EU에 수출하는 기업은 해당 제품을 생산할 때 발생하는 탄소배출량을 바탕으로 EU 탄소배출권거래제에서 인정하는 무상 할당량을 제외하고 자국 생산 과정에서 지불한 탄소 가격 즉 배출권 거래나 탄소세 비용 등을 다시 차감한 만큼을 인증서로 구매하면 된다. 다만 EU는 배출권 무상할당을 단계적으로 축소한다. CBAM 시행 첫 해인 2026년에는 탄소 배출 무상할당 비율을 97.5%로 축소하고 매 2년마다 그 폭을 확대해 2034년에는 ‘제로(0)’화하겠다는 계획이니 EU에 제품을 수출하는 기업들의 탄소 관련 비용 부담은 갈수록 늘어나게 된다.
미국도 EU CBAM과 유사한 탄소 통상 규제를 준비하고 있다. 지난해 6월 미국 상원은 미국식 탄소국경조정제도인 ‘청정경쟁법안(이하 CCA : Clean Competition Act)’을 발의했는데 CCA는 석유화학제품 등 12개 수입품에 대해 탄소 1톤당 55달러씩 일괄적으로 관세를 부과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EU의 CBAM는 배출권 가격, 미국 CCA는 탄소 무게가 탄소 관세 부과 기준이라는 점이 다를 뿐 탄소 관련 무역 장벽이라는 점은 같다. 다만 일정 세율을 일괄적으로 부여받는 관세와 달리 EU의 CBAM이나 미국의 청정경쟁법안 모두 제품 수출국의 탄소 저감 기술이 진화되는 만큼 국경을 넘는 과정에서의 탄소 관세 비용이 줄어들 수 있다는 점이 차별화된다. 제품 수출국 기업들이 탄소 누출을 줄일수록 EU 국경을 넘는 과정의 탄소 비용이 줄어들고 관세율이 낮아지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으니 탄소 저감이 곧 수출 경쟁력이 되는 셈이다.
탄소 배출 많은 철강 등 수출 주력 산업 타격 불가피
우리나라도 온실가스 배출권거래제를 도입해 탄소 저감을 도모 중이지만 EU, 미국 등의 환경 선진국들이 탄소 관련 무역 장벽을 세우는 것은 부담스러울 수 밖에 없고 기업들이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탄소비용이 관세 역할을 하게 되면 수출 단가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2021년 7월 EU 집행위원회의 탄소국경조정제도 입법안 발표 당시 전국경제인연합회(이하 전경련)는 ‘수입품에 차별적인 조치를 취하는 것은 자유무역 규범에 어긋날 수 있고 EU와 같은 배출권거래제를 운영하는 한국은 CBAM 적용 면제국으로 지정돼야 한다’는 건의서를 EU측에 전달했다. 우리 정부도 한-EU FTA 무역위원회와 지속가능위원회, WTO 정례회의 등을 통해 CBAM 시행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고 차별적 조항 개선을 요구하는 정부 서한을 발송하는 등의 조치를 취해 왔다. 하지만 EU의회 논의 단계에서 탄소 규제 압박 수위는 더 높아졌다.
당초 EU집행위원회는 탄소국경조정제도 적용 품목으로 철강, 시멘트, 알루미늄, 비료, 전력 등 5가지를 선정했는데 EU 의회는 수소, 플라스틱, 유기화학품, 암모니아 등 4가지 품목을 추가했다. 탄소 배출 적용 범위도 사업장의 탄소 직접 배출을 규제하는 ‘Scope 1’에서 제품 생산에 투입되는 전기, 열 등에서 발생하는 탄소 간접 배출을 규제하는 ‘Scope 2’로 확대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대목은 지난 4월 25일, EU 이사회가 최종 승인한 탄소국경조정제도 법안에는 철강, 알루미늄, 시멘트, 비료, 전력에 수소만 더해졌고 플라스틱, 유기화학품, 암모니아는 제외됐다는 점이다.
이제 적용 대상 품목들은 2026년 이후 EU로 수출하는 과정에서 탄소비용을 부담해야 한다. 산업부에 따르면 2021년 기준 우리나라가 EU에 수출한 철강은 43억불 규모이고 알루미늄은 5억불, 비료가 480만불, 시멘트 140만불을 기록했다. 이중 철강은 대표적인 온실가스 배출 산업으로 상당한 타격이 우려된다. 환경부에 따르면 2020년 철강산업 온실가스 배출량이 9,310만 톤을 기록하며 국가 전체의 14.2%를 차지했다. 철강에 비해 수출액이 크지는 않지만 알루미늄 역시 볼트나 잉곳 등 2차 가공품 생산 과정에서의 탄소 배출이 상당하다. EU가 탄소 배출 범위를 확장 적용하면 부담은 더 커지게 된다. EU는 탄소 간접배출도 CBAM 대상에 포함시키기 위한 방법론을 마련 중인데 적용 범위가 확장되는 만큼 탄소 비용도 늘어나게 된다. 가장 대표적인 탄소 배출 범위는 ‘제품 생산 단계에서 발생되는 직접적인 배출량’인 ‘Scope 1’이 꼽힌다.
사업장에서 사용되는 전기, 스팀, 열 같은 에너지의 탄소 배출량을 규제하는 ‘Scope 2’, 협력업체 등에서 발생하는 탄소 배출을 의미하는 ‘Scope 3’ 같은 간접 배출도 탄소 규제 대상으로 해석되고 있는데 EU는 ‘Scope 2’ 단계까지 탄소국경조정제도 범위에 포함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지난 해 9월 대한전기협회 주최로 열린 ‘RE100 및 탄소국경조정제 대응전략 세미나’에서 국회 미래연구원 정훈 위원은 “탄소국경조정세가 전면 도입될 때의 국내 산업 부담액을 추정한 결과 국내 산업 총 부담액은 8조 2,456억 원 규모로 EU 수출 예상액의 11.3%에 해당되는 것으로 분석됐다”고 밝혔다. 국내 수출액의 99% 이상이 제조업이고 주요 수출 업종이 반도체, 자동차, 석유화학, 석유제품, 철강, 기계 등 에너지 다소비와 온실가스 다배출 업종인 우리나라 산업 특성을 고려하면 탄소국경조정제도가 기업들의 수출경쟁력에 타격을 가하는 상황을 회피할 길은 어려워 보인다.
탄소 저감 못하면 국가 수출 생존 위협 받을 수 있어
탄소 감축은 이제 단순한 환경 보호 차원을 넘어 기업과 국가 생존을 좌우하는 무역 아젠다로 확장되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당장의 탄소 관세 부담은 줄이면서 궁극적으로는 탄소중립으로 신속하게 전환해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지혜’가 요구되고 있다. 정부는 범부처 차원의 ‘EU CBAM 대응 TF’를 꾸렸고, 가장 큰 비용 부담이 우려되는 철강산업과 관련해 ‘탄소규제 국내 대응 작업반’을 공식 발족하며 대응 방안을 모색 중이다.
EU 측에는 탄소 배출 범위를 제한하고 배출 검증 기관의 범위를 넓혀 줄 것을 요청 중이다. 탄소배출권거래제를 시행 중인 EU는 사업장에서 직접 배출되는 탄소량에 한정해 탄소 비용을 부담시키고 있다. 반면 탄소국경조정제도에 적용되는 탄소는 직간접 배출량 모두를 포함시키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이에 대해 우리 정부와 기업 단체들은 EU 회원국에게 적용되는 탄소 배출 관련 비용이 제품 생산 과정에서 직접 배출되는 ‘Scope 1’에 제한된다는 점을 들어 제3국에서 수입되는 제품만 ‘Scope 2’까지 확장하는 것이 형평에 맞지 않다는 입장을 EU측에 전달하고 있다.
EU는 탄소배출량 검증을 EU 기관만 수행할 수 있도록 제한하고 있는데 국제상호인정협정 체결 등을 근거로 EU 이외 국가의 검·인증 효력을 인정받는 방안도 EU측에 요청 중이다. 당장은 EU 탄소국경조정제도 규제에서 벗어났지만 에너지·화학 산업에 대한 탄소 관세 규제도 대비해야 한다. EU는 탄소국경조정제도 대상으로 역내를 넘어 수입되는 전기, 수소 같은 에너지도 포함시켰다. EU 이사회 최종 승인안에서는 빠졌지만 플라스틱이나 유기화합물도 잠재적인 탄소 관세 부과 대상으로 지목받고 있다. 미국 정부는 석유화학제품 등을 대상으로 탄소 관세를 부과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정부는 철강, 시멘트, 석유화학 등 탄소중립이 요구되는 산업의 핵심기술 개발사업에 올해부터 2030년까지 9,352억 원을 지원해 탄소감축 기술개발을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수출시장 생존이 달린 기업들의 적극적인 탄소 저감 대응도 요구되고 있다. 포스코는 광양제철소에 약 6,000억 원을 투자해 고로에 비해 탄소배출이 낮은 연산 250만 톤 규모의 전기로를 설치하고 EU 탄소국경조정제도 비용이 본격적으로 발생하는 2026년부터 가동하겠다고 최근 밝혔다. 탄소배출량이 많은 석탄 같은 화석연료 대신 수소를 환원재로 사용하는 ‘수소환원제철(hydrogen direct reduced iron)’ 기술개발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철강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 주력 수출 품목인 정유·석유화학 업계의 대응 노력도 절실한 상황이다. 2020년 기준 우리나라 제조업의 온실가스 직접 배출량 중 철강이 9,313만 CO₂eq로 가장 많았고 뒤이어 석유화학이 4,689만 CO₂eq로 2위, 정유산업이 1,517만 CO₂eq로 3위에 랭크될 정도로 온실가스 다배출 산업이기 때문이다. 다행인 점은 환경 선진국 탄소 관세에 대응하기 위한 관련 업계의 선제적인 탄소 저감 노력이 본격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GS칼텍스를 들 수 있는데, 탄소저감과 에너지·자원의 효율화 등을 목적으로 ▲ 플라스틱 순환 경제 구축을 위한 플라스틱 재활용 기술 개발 ▲ 탄소 포집 · 활용 · 저장 기술(CCUS, carbon capture, utilization and storage)을 적용한 청정수소 클러스터 구축 ▲ 탄소 감축 효과가 80%로 평가받는 바이오 연료 사업 등을 통해 ‘그린 트랜스포메이션(Green Transformation)’에 속도를 내고 있다는 소식이다. 강한 자가 ‘룰(rule)’을 주도하기 마련인데 한 때 자유무역주의를 글로벌 스탠다드로 포장했던 주요 선진국들은 점차 보호무역주의로 회귀 중이며 탄소를 위시한 지구온난화도 그 명분 중 하나로 내세워지고 있다. 탄소관세 등 환경 관련 보호무역 규제를 단순히 뒤따라 갈 것인가 아니면 탄소 저감 기술 개발과 산업 구조 전환에 선제적으로 대응해 앞장서려 노력할 것인가는 이제 선택의 아닌 생존의 영역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