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우리나라 전체 수출액 6,839억 불 중 반도체는 18.9%에 해당되는 1,292억 불을 차지했고, 원유 전량을 수입하는 자원 빈국임에도 지난해 우리나라 정유사들은 630억 불의 석유를 해외에 판매하며 국가 전체 수출액 중 9.2%의 비중을 기록했다. 국가 재정에서 반도체, 석유제품 같은 수출 주력 품목의 기여도가 높지만, 글로벌 경쟁 요인을 감안하면 우리 정부나 기업이 수출 가격을 정할 수는 없다.
그런데 석유 수출이 주력인 산유국들은 카르텔을 통해 공공연하게 생산량을 조절하며 스스로가 희망하는 ‘균형재정유가’를 결정하려 한다. 한편으로는 균형재정유가와 관련한 산유국간 입장 차이로 카르텔 틈새가 벌어지기도 한다. 균형재정유가와 관련한 산유국들의 동상이몽을 최근 사우디의 행보 속에서 들여다봤다.
산유국에게 석유 판매 수입이란…
석유수출국기구 OPEC의 리더인 사우디는 국가 재정의 절반 정도를 원유 수출로 확보한다. 비OPEC 산유국을 대표하는 러시아 역시 국가 재정 수입의 절반을 원유와 천연가스 수출로 벌어들이고 있다. 국내총생산 즉 GDP에서 석유판매 수익이 차지하는 비중도 절대적이다. <더 글로벌 이코노미>에 따르면 2020년 기준 이라크 GDP 중 석유 수입 비중이 32.24%를 차지했다.
유가 낮으면 정부 재정 펑크
‘균형재정유가(Fiscal breakeven oil prices)’는 산유국 정부의 재정이 적자가 되지 않는 수준의 원유 가격을 말한다. 여기서의 ‘산유국(産油國)’은 OPEC 회원국들처럼 원유 생산이 국부 창출 즉 GDP에서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나라를 말한다.
미국의 원유 생산량은 세계 최대 산유국 중 한 곳인 사우디를 뛰어넘었지만 동시에 세계 최대 석유 소비국인 탓에 국가 경제에서 차지하는 원유 수출 기여도는 미미해 협의적인 개념의 산유국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오히려 미국은 OPEC에 대응하기 위해 국제에너지기구 IEA 설립을 주도한 대표적인 에너지 소비국으로 꼽힌다.
산유국 GDP에서 원유 비중이 절대적인 만큼 유가가 높을수록 국가 재정에 긍정적이다. 사우디를 비롯해 이란, 이라크, 쿠웨이트 같은 중동 산유국과 세계 최대 석유 매장량을 지닌 베네수엘라 등이 지난 1961년 석유수출국기구 OPEC(Organization of the Petroleum Exporting Countries)을 결성한 것도 궁극적으로는 국가 균형 재정에 기여할 수준의 유가를 유지하려는 목적이 컸고 현재까지도 석유 생산량을 조절해 유가를 부양하는 ‘카르텔(cartel)’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다.
최근에는 OPEC+(OPEC 플러스)라는 협의체로 확장해 전 세계 석유 공급량을 조절하고 있다. 2010년대 들어 미국이 비전통자원인 셰일오일 개발에 본격적으로 나서면서 스윙 프로듀서로서의 OPEC 역할에 비상이 걸리자 사우디 주도로 비OPEC 산유국까지 끌어들인 결과다.
OPEC 회원국과 10개 비OPEC 산유국은 2016년 12월, 오스트리아 빈에 모여 석유 시장 안정을 위한 협력과 대화 플랫폼으로 ‘산유국 협력선언(The Declaration of Cooperation, DoC)’을 설립하며 산유국 카르텔의 확장판인 ‘OPEC+’가 탄생했다.
시장 경제에서 가장 불량한 불공정행위 중 하나가 ‘담합’이고 ‘카르텔’은 경쟁 제한을 목적으로 생산량과 가격 등을 합의, 조정하기 위해 결정된 ‘담합 조직’이니 환영받지 못할 이유는 차고 넘친다.
하지만 석유 수입이 국가 재정에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산유국 입장에서는 균형재정유가에 기여하는 기능의 OPEC+ 같은 카르텔은 매우 유용한 조직인 것이 분명하다.
산유국마다 균형재정유가는 다르다
개발과 생산이 용이한 전통 육상 유전의 경우 원유 단순 생산 비용은 배럴당 10~20불 수준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중동 벤치마크 유종인 두바이유 가격이 최근 약세를 보이면서 배럴당 70불대까지 떨어졌지만 단순 생산 비용을 감안하면 현재도 막대한 이익을 취하고 있는 셈이다. 해상유전이나 셰일원유 같은 비전통자원의 개발 생산 비용이 상대적으로 높은 점을 감안하더라도 충분한 채산성을 확보할 수 있는 유가 수준인데 그렇다고 모든 산유국이 현 수준에 만족하는 것은 아닌 것으로 보여진다.
석유공사 이석기 석유정보팀장은 ‘OPEC+ 기습감산과 향후 국제석유시장 전망’ 리포트에서 “산유국들은 석유 수출을 통해 막대한 재정 지출 비용을 조달해야 한다”며 “OPEC+에 참여 중인 산유국들은 석유 생산 수출에 의한 국가 재정 충당 비중이 매우 높아 균형재정유가가 중요한 지표가 된다”고 지적했다. 그런데 산유국마다 처한 정치, 경제적 환경 등이 달라 원유 수출국들의 균형재정유가가 모두 같을 수 없다.
사우디는 이슬람 수니파 종주국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높은 재정 비용을 감당하는 과정에서 균형재정유가 기대치가 다른 산유국 보다 높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중동 산유국 사이에서도 균형재정유가 기준이 다르다는 평가다.
잘 알려진 것처럼 UAE를 구성하는 7개 연방 중 하나인 두바이는 세계 최고층(829.8m) 빌딩인 부르즈 칼리파(Burj Khalifa), 야자수 모양의 인공섬인 팜 주메이라(Palm Jumeirah) 등을 건설하며 글로벌 관광도시로 변모 중이다. 두바이는 사우디와 마찬가지의 중동 산유국이지만 관광 등 다양한 사업을 통해 국가 재정을 확보하고 있어 국가 재정 균형을 위해 기대하는 유가 수준이 사우디 보다 낮을 수 있다는 분석이다.
OPEC 설립을 주도한 베네수엘라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양의 원유를 보유하고 있지만 반미 정권에 대한 미국 정부의 대응으로 원유 수출 제한을 포함한 다양한 경제 제재가 시행되면서 넘쳐나는 원유가 국가 자산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3,000억 배럴이 넘는 확인 매장량을 가지고 있지만 베네수엘라의 하루 원유 생산량이 70만 배럴 수준에 그칠 정도로 국가 재정 기여도는 매우 낮다.
서방 세계로부터 원유·천연가스 수출 금지, 가격 상한제 등의 경제 제재를 받고 있는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와의 전쟁 비용 등에 막대한 국가 재정이 필요한 상황이다. 산유국 마다의 다양한 사정 만큼 요구되는 균형재정유가가 달라지는 환경은 OPEC+ 카르텔의 틈새가 되기도 한다.
균형재정유가 낮은 러시아, 감산 선언하고도 수출 늘려
사우디, UAE 등에 비해 경제 상황이 열악한 일부 OPEC+ 회원국들은 감산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고 생산량 조정 과정에서 더 많은 원유생산 쿼터를 부여해달라고 요구하는 등 갈등이 다반사로 벌어지고 있다.
팬데믹이 한창이던 2020년 말 플래츠(Platts)는 “코로나 19 상황이 지속되면서 OPEC+ 회원국 중 부유한 국가들과 그렇지 못한 국가 사이의 경제적 불균형이 증폭되면서 모든 회원국에 맞는 균형재정유가 합의점을 찾는데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다”고 원유 생산 그리고 유가와 관련한 OPEC+ 회원국들의 각기 다른 입장을 설명했다. 비OPEC 산유국을 대표하는 러시아도 앞으로는 OPEC+를 통한 감산 동맹을 주창하면서도 뒤에서는 자국의 실리를 챙기는데 분주한 모습이다.
외신에 따르면 서방측의 가격상한제 시행 등에 맞서 러시아는 지난 2월 하루 50만 배럴의 원유 감산을 발표하며 자원무기화에 시동을 걸었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높은 수출 물량을 유지하고 있다. S&P Global에 따르면 다양한 경제 제재가 시행 중인 올해 1~5월 러시아산 우랄 원유 수출량은 하루 232만 배럴에 달해 지난해 평균인 188만b/d 대비 23.4%가 오히려 늘었다.
IEA는 러시아가 지난 3월 이후 오는 12월까지 하루 50만 배럴을 감산하겠다는 스스로의 발표도 지키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가격 상한제에도 불구하고 러시아가 원유 수출을 공격적으로 확대할 수 있는 배경 중 하나는 중동 주요 산유국에 비해 균형재정유가가 낮다는 점도 작용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플래츠에 따르면 최근 러시아 우랄 유종은 벤치마크 유종인 브렌트 대비 배럴당 약 25.35불 할인된 가격에 판매되고 있다.
서방 제재의 영향으로 러시아 원유는 배럴당 60불을 넘겨 수출하지 못하는 가격상한제가 적용 중이고 EU는 러시아산 석유 금수 조치를 시행하고 있는데 러시아는 낮은 가격을 앞세워 인도, 중국, 튀르키예 등으로의 수출을 늘리고 있다.
지난해 11월 이후 올해 12월까지 하루 200만 배럴의 감산을 시행중인 OPEC+가 지난 5월 추가 감산에 돌입한 것도 균형재정유가에 대한 가입국들의 각기 다른 입장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라크, 카자흐스탄 등의 일부 회원국이 감산 쿼터를 지키지 않으면서 유가 부양 약발이 약화됐고, 사우디 주도로 OPEC+ 일부 가입국들이 가세해 5월 이후 하루 116만 배럴의 ‘자발적인 추가 감산’이 진행 중이다.
탈석유에 천문학적 재정 필요한 사우디는 절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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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 - 에너지플랫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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