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 전망을 고쳐 올해 나머지 기간 그리고 내년 평균 유가를 일관되게 높여 수정한 배경에 대해 EIA는 OPEC+를 양분하는 사우디, 러시아 주도의 공급 축소를 지목하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하루 100만 배럴의 자발적인 원유 생산량 감축을 진행 중인 사우디가 당초 9월말 종료 예정이던 계획을 수정해 올해 말로 연장하겠다고 최근 발표한 것을 계기로 오는 4분기 세계 석유 재고가 20만 B/D 감소하고, 유가는 오를 것으로 EIA는 전망했다. 실제로도 최근의 WTI, 브렌트 가격은 연중 최고를 경신 중이고 시티은행 등 일부 기관들은 연내 단기적으로 100불을 상회할 수 있다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필자는 2016년 1월, 주한미국대사관 요청으로 당시 마크 리퍼트 (Mark W. Lippert) 주한미국 대사를 단독 인터뷰한 적이 있는데, “미국 원유가 수출되면 한국의 에너지 안보 다변화에 기여할 것”이라고 말한 대목이 기억이 난다.
인터뷰에서 마크 리퍼트 대사는 “미국은 세계 최고이자 최대인 석유 및 천연가스 생산국”이라고 언급했고, “미국에서 생산되는 경질원유는 한국 정유업계에 매력적인 상품이 될 수 있을 것이며 한국의 에너지 안보 다변화에 큰 혜택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국 정유사를 상대로 일종의 원유 세일즈를 홍보한 셈인데 실제로 당시 GS칼텍스는 국내 정유사 최초로 미국 본토에서 생산산 이글포드 원유(Eagle Ford Crude) 100만 배럴을 첫 도입했다.
‘이글포드’는 미국 텍사스주에 위치한 대표적인 셰일원유 산지이니 비전통자원 개발 기술 진화로 미국이 석유 수출국 지위에 들어섰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가 분명했고, 이후 우리나라 정유사로 향하는 미국발 유조선이 크게 늘었다.
8년 전 일을 끄집어낸 이유는 당시 미국이 석유 수출에 나선 것이 OPEC+ 탄생의 빌미가 됐기 때문이다.
석유수출국기구 OPEC은 2016년 12월 또 다른 자원 부국인 러시아 등을 끌어들여 OPEC 확장판인 OPEC+를 구성했다.
원래도 산유국이었지만 수요에 비해 생산량이 적었던 미국은 에너지 안보를 위해 석유 수출을 제한했다.
그런데 땅속 암반층 사이 사이에 묻힌 원유와 가스를 발굴하는 수평시추·수압파쇄 공법의 진화로 이른바 셰일 혁명이 성공하면서 미국은 2015년 석유 수출 금지 조치를 전격 해제했다.
셰일원유 생산이 늘면서 미국이 세계 원유 시장의 스윙 프로듀서(swing producer)로 주목받는 상황은 사우디 등 전통적인 석유 수출 산유국 입장에서는 눈엣가시였고, 러시아로 대표되는 비OPEC 산유국 힘까지 모아 세계 원유 공급 시장을 주도하겠다는 의지는 OPEC+ 탄생으로 이어졌다.
BP 통계에 따르면 2012년 미국 원유 생산량은 하루 893만 2,000배럴에 그쳤다. 같은 해 세계 최대 원유 생산국은 사우디로 하루 1,162만 2,000배럴을 공급했고, 러시아가 1,065만 6,000배럴로 그 뒤를 이었다.
그런데 지난해 미국 원유 생산량은 1,777만 배럴로 2012년에 비해 두 배 가량 늘었다.
2012년 이후 2022년 사이 미국의 원유 생산 증가율은 연평균 7.1%에 달할 만큼 놀라운 성장세를 보였다.
지난해 세계 원유 생산량 중 미국 점유율은 18.9%로 1위를 차지했다. OPEC 맹주격인 사우디 점유율 12.9%보다도 6%P가 높았으니 셰일원유 개발이 세계 원유 공급 판도에 얼마나 엄청난 영향을 미쳤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현재도 미국 내 시추와 유정 활동을 보여주는 지표인 셰일원유 리그(rig) 수가 줄고 늘어나는 과정은 국제유가 변동에 영향을 미칠 정도다.
2015년 사우디산 원유가 29.8%, 쿠웨이트 13.8%, 이라크 12.3%, 카타르 12.0%, UAE 9.7% 등 중동 국가 일색이었던 주요 도입선도 지난해에는 32.9%의 비중을 기록한 사우디에 이어 미국이 13.2%로 2위를 점유하며 다른 중동 산유국들을 앞질렀다.
미국의 석유 수출은 우리나라 같은 에너지 수입국 입장에서 원유 도입 선택의 폭이 넓어지는 긍정적인 사건이지만, OPEC 산유국들은 생산량 조절을 통한 유가 부양 동력이 줄어드는 위기로 인식됐고 더 강력한 카르텔인 OPEC+ 결성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 조직을 이끌고 있는 사우디와 러시아의 단합된 담합이 주춤했던 국제유가를 다시 끌어 올리고 있다.
2020년 1월, OPEC+는 2018년 10월 생산량을 기준으로 하루 170만 배럴의 감산에 돌입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세계 석유 수요가 급감하며 유가가 바닥을 치던 2020년 5월에는 세계 공급량의 약 10%에 해당되는 하루 970만 배럴의 생산을 줄이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팬데믹에서 벗어난 이후에도 OPEC+는 생산량 조절을 통한 유가 부양 시도를 멈추지 않고 있다. 2022년 11월 이후 올해 12월까지 OPEC+는 하루 200만 배럴의 감산을 시행 중인데 지난 5월에는 116만 배럴의 추가 감산을 선언했다.
다행스러운 대목은 카르텔을 견제할 수 있는 또 다른 힘의 존재인데 올해 들어 미국, 브라질 등 비OPEC 산유국 공급량이 증가하고 이란도 수출을 늘리면서 카르텔 감산 효과는 상당 부분 희석됐다는 평가다. IEA에 따르면 올해 들어 8월까지 미국, 브라질 등을 중심으로 원유 공급 물량이 190만 B/D가 늘며 비OPEC+ 산유국들은 5,050만 B/D에 달하는 기록적인 공급량을 유지했다. OPEC 회원국이지만 감산 조치 면제국인 이란도 하루 60만 배럴 규모의 공급량 증가로 OPEC+ 감축 효과를 낮췄다. 하지만 4분기 분위기는 사뭇 다를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IEA는 9월 보고서에서 “사우디와 러시아의 동맹(The Saudi-Russian alliance)이 석유 시장에 무서운 도전이 되는 것이 입증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특히 사우디·러시아의 감축 연장으로 상당량의 공급 부족이 발생해 4분기 세계 석유 수급이 타이트해질 것으로 우려한 대목은 EIA의 최근 전망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OPEC+를 이끄는 사우디와 러시아는 OPEC+의 공동 감축 목표와는 별개의 추가적인 자발적 감산과 수출 축소에 나서고 있다. 사우디는 지난 4월 하루 50만 배럴의 자발적 감산을 발표했고, 7월에는 100만 배럴로 확대했다. 또한 시장 상황에 따라 자발적 감산 기한을 추가 연장할 수 있다고 밝혔고, 1개월 단위로 연장해 왔다. 다만 시장에서는 사우디 감산 조치가 9월 종료될 것으로 전망했는데, 오히려 올해 12월까지 연장하는 카드를 꺼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침공과 관련한 서방 세계의 석유·원유 가격 상한제 시행에 반발해 지난 3월 이후 하루 50만 배럴의 원유 생산을 줄이며 세계 석유 수급을 압박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현재는 수출 감축량을 하루 30만 배럴로 줄였지만, 기한은 오히려 12월까지로 늘렸다.
사우디와 러시아는 매월 시장 평가를 통해 공급 감축 조정 여부를 검토할 것이라고 덧붙이고 있는데 이들이 시장에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간명해 보인다. ‘유가 하락을 보고 있지 않겠다’는 것이다. 특히 세계 원유 공급 시장에서 스스로의 지분이 줄어드는 자발적 감산과 수출 감축을 감수하고서라도 균형재정유가를 지키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내비치고 있다. 실제로 사우디의 원유 생산량은 최근의 자발적인 독자 감산 등의 영향으로 2년래 가장 낮은 900만 b/d 수준까지 떨어졌다는 분석이다.
사우디와 러시아 영향력은 더욱 커질 것으로 보여진다. 지난 7월 기준 OPEC 내 여유 생산 능력(spare capacity)을 보유한 국가는 사우디(320만b/d)와 UAE(110만b/d) 정도이고 다른 비OPEC 산유국 중에서는 러시아(60만b/d)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산유국이 한계생산량에 도달했다는 분석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여유 생산 능력을 보유한 사우디나 러시아의 역할이 매우 중요한데 오히려 이들은 생산이나 수출을 줄여 세계 석유 수급을 더욱 옥죄려 하고 있고 올해 하반기 유가 강세가 예견되는 배경이 되고 있다.
다만 원유 공급 확대 그리고 세계 석유 재고 증가 등의 영향으로 내년 유가는 올해 보다 하락할 것으로 전망된다는 점은 다행스럽다.
하지만 자발적 감축이 석유 수급과 유가에 미치는 영향력을 확인한 OPEC+ 양대 축 사우디와 러시아가 언제든지 단합해 다시 담합 카드를 꺼내 들 수 있다는 점은 에너지 절대 수입국인 우리나라 입장에서 특히 공포스럽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