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日 정유산업 재편, 그 안에 ‘석유산업 자유화’ 그리고 ‘경쟁’ 있었다

GS칼텍스 -

일본 석유 시장에서 글로벌 석유 메이저 기업들의 흔적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쉘이나 모빌 같은 글로벌 에너지 기업들의 상표를 달고 있는 주유소는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그런데 ‘흔적’이 되는 것은 정유산업 재편 과정에서 메이저 대부분이 일본 시장에서 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정유산업 출발은 글로벌 메이저들이 주도했지만, 성장기 이전에 대부분이 철수했고 산업 재편 과정을 거치면서 현재는 직간접적인 경영 참여 형태가 유지되고 있다. 다만 소규모이고 효율이 떨어지는 정제사들이 헤쳐서 모이는 과정에서 외국계 기업들이 흡수 합병되며 민족 자본 지배력이 높아진 일본과 달리 세계 최고 수준의 정제 능력을 보유한 우리나라 정유사들은 지배 그룹의 경영 환경에 따라 주인이 바뀌는 정도의 부침을 겪었다는 점이 다르다. 정유산업 재편 배경에서 두드러진 공통점도 눈에 띄는데 양국 정부가 석유 산업 자유화와 대외 개방 정책을 펼치면서 치열한 경쟁에 노출된 영향이 컸다는 점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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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 수입 장벽 허물며 촉발된 일본 정제업 경쟁

일본의 원매사(元賣社)는 정제 과정에서 생산된 석유제품을 유통하는 최상단에 위치한 우리나라의 정유사 개념에 해당된다. 일본에서는 쉘(Shell), 에소(Esso), 모빌(Mobil) 등 익숙한 메이저 기업들이 자신들의 브랜드로 활동했다. 우리나라에도 쉐브론(Chevron)이나 아람코(Aramco) 같은 메이저 기업들이 직간접적으로 진입해 있지만, 독자적인 정제설비를 갖추고 직접 유통 시장에 진출해 민족 자본과 경쟁 구도를 형성했던 일본과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해석된다.

그런 일본에서 흡수 합병 등의 구조조정 과정을 거치며 ‘그 많던 정제기업’들이 사라지고 있는데 정부 당국의 석유 산업 규제 완화 영향이 컸다는 분석이다. 특히 지난 1996년 ‘특정 석유제품 수입 잠정조치법(이하 특석법)’이 폐지된 것이 경쟁을 촉발하는 결정적인 신호탄이 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소비지 정제주의를 채택한 일본 정부는 ‘특석법’을 통해 휘발유와 등유, 경유 수입을 사실상 정제업자에게만 허용했다.

‘소비지 정제주의(消費地 精製主義)’는 원재료인 원유를 도입해 자국 내에서 석유제품을 직접 정제, 생산, 소비하는 정책으로 우리나라나 일본처럼 자원 빈국들이 채택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완제품 석유제품 수입을 정책적으로 통제했는데 특석법이 폐지되면서 비 정제업자의 석유 수입 장벽이 사라졌고 일본 석유 유통 시장의 경쟁이 본격화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소규모 정제업체 흡수합병과 재편의 연속

특석법을 폐지하며 석유 수출입 시장을 개방한 데 이어 일본 정부는 주유소의 휘발유 구입선 명시 의무 폐지, 셀프주유소 허용 같은 규제 완화 조치를 취했다. 그 결과는 정제산업의 구조조정으로 연결됐다. 먼저 1999년 4월 일본 석유와 미쓰비시석유 합병이 이뤄졌다. 에소(Esso)와 모빌(Mobil)이 통합되면서 일본에 진출했던 이들 기업들도 2002년 6월에 엑슨모빌( ExxonMobil)로 대형화됐다.

2008년에는 원유 가격 급등과 에너지 시장 경쟁 격화로 신일본석유가 큐슈 석유와 합병했고 2010년 7월에는 업무 제휴 관계이던 재팬에너지와 다시 통합되면서 JX닛코일본석유에너지가 설립됐다. 2012년 6월에는 엑손 모빌 재팬 그룹이 일본 자본인 도넨 제너럴 석유를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토넨 제너럴 그룹이 탄생했다. 이후에도 제품 공급과 물류 경쟁력 강화를 목표로 업무 제휴와 경영 통합이 추진되면서 2017년 2월, 코스모석유와 키그나스 석유가 자본 업무 제휴를 체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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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4월에는 JX닛코일본석유에너지와 도넨제너럴석유가 통합되면서 일본 정제 능력의 55%를 차지하는 JXTG에너지가 발족된다. JXTG에너지는 2020년 7월, 신일본석유 시절부터 사용해온 주유소 브랜드 ‘ENEOS’를 사명으로 변경해 ENEOS주식회사로 변경됐다. ENEOS주식회사는 지난 20년 동안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8곳의 원매사를 통합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2019년 4월에는 이데미츠 코산과 쇼와 쉘 석유가 통합되면서 이데미츠로 일원화됐다.

소규모 정제설비들이 난립한 상황에서 내부 경쟁이 본격화됐고 정제, 원매사간 인수합병(M&A)과 업무 제휴를 통한 집약화가 본격화되면서 원매사의 2/3 정도가 사라졌다. 일본 석유연맹 자료에 따르면 흡수 합병과 사업 재편 등의 구조조정 끝에 17개 석유 원매사 중 12곳이 사라졌고 현재 5사로 집약되어 있다. 원매사가 다른 원매사에 흡수되고 원매사들끼리 뭉치고 대형화하는 과정의 연속이었는데 최근까지도 흐름은 계속됐다.

그 과정을 일본 석유연맹은 ‘석유 메이저의 세계적인 재편 흐름, 특석법 폐지 후 일본 석유 업계의 경쟁 격화 등을 배경으로 석유 정제·원매사 재편 움직임이 활발해졌다’고 평가했다. 주목할 대목은 정제산업 재편 과정에서 외국 메이저들이 물러나고 일본 민족계 석유회사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소위 ‘걸리버’로 불리는 대형 원매사가 등장하며 시장을 지배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 일본 정제 산업은 ENEOS가 자국 석유 유통의 50%, 또 다른 민족 자본인 이데미츠가 30%를 장악한 상태로 파악되고 있다.

쉘과 합작, 걸프가 경영권 행사했던 한국 정유 시장

우리나라에서도 석유 메이저 흔적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SK에너지 전신인 유공의 경영권은 한때 미국 걸프(Gulf)가 행사했고 GS칼텍스는 지분의 절반을 글로벌 메이저 칼텍스(Caltex)와 나눠 가지고 있다. S-OIL은 세계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 국영 석유회사 아람코가 최대 주주이다. 현대오일뱅크 전신인 극동정유는 로얄더치쉘과의 합작이 시초였고 쉘이 우리나라에서 철수하는 과정에서 현대그룹이 해당 지분을 인수하며 현대정유로 이름을 바꿨다. 그랬던 현대정유도 한때 중동 석유 자본이 경영권을 행사하기도 했다.

지난 1999년 중동 석유 자본인 아랍에미리트연합(UAE) IPIC(아부다비 국영석유투자회사)가 대주주로 직접 경영에 참여하면서 외자 기업으로 전환됐는데 현대중공업이 2010년 IPIC 보유 지분 70%를 다시 인수하면서 이제는 현대가 혈통을 유지하고 있다. 흥미로운 대목은 한때 현대정유를 경영했던 IPIC 회장이 세계 최대 부자 중 한 명이며 세계 유수의 축구단인 맨체스터 시티 구단주 만수르라는 점이다. 지구인 중 최고의 석유 재벌 중 한 명이 한때 대한민국 정유사를 소유했던 셈이다. 현대중공업은 지난 2019년, S-OIL 최대 주주로 경영권을 행사 중인 사우디 아람코에 현대오일뱅크 지분 17%를 매각했고 아람코는 2대 주주 신분을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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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사 부도나며 대마불사 신화 깨지기도

한국 정유사들도 적지 않은 부침을 겪어 왔다. 정유사가 부도나며 대마불사(大馬不死) 신화가 깨지기도 했다. 한화그룹의 모기업인 한국화약이 1969년 미국 유니온오일과 합작해 설립한 경인에너지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합작사인 유니온오일이 1983년 철수했고 이후 한화에너지로 사명을 변경했지만 1997년 외환위기 여파로 자금난을 겪던 한화그룹이 정제 부문을 현대그룹에 부문 매각하면서 역사에서 사라졌다.

그런데 현대로 넘어간 한화에너지의 운명은 이후에도 순탄치 못했다. 현대정유로 경영권이 넘어가면서 인천정유로 사명이 바뀌며 재기를 노렸지만, 국제 석유 시황 악화와 내수 시장 경쟁 심화 등의 영향으로 2001년 9월 법정관리 신세에 처했다. 인천정유 회생 과정에서 중국 국영 석유 기업인 시노켐이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되며 또 다른 해외 자본의 국내 정유업 진출이 시도됐는데 인수 조건 등에서 채권단의 반대에 부딪혔고 SK그룹이 인수하며 현재 SK인천석유화학으로 변신, 운영 중이다. 현대정유(현 현대오일뱅크) 역시 유동성 위기 등을 겪으며 중동 자본인 UAE의 IPIC에 경영권이 넘어갔던 흔적이 남아 있다.

S-OIL의 전신인 쌍용정유도 1999년의 쌍용그룹 구조조정 과정에서 계열 분리되며 최대 주주였던 사우디 아람코가 현재까지 경영권을 행사 중이다. 이러한 우리나라 정유산업 구조조정은 1997년의 외환위기 당시 그룹 차원의 유동성 위기가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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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일본과 마찬가지로 석유산업 자유화·개방화에서 비롯된 경쟁이 정유산업 재편에 한몫한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실제로 우리 정부는 석유사업법(현 석유 및 석유대체연료 사업법)을 개정해 1997년 이후 석유 수출입 승인제도를 폐지하며 비 정유 기업들도 자유롭게 석유를 수입, 유통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됐다.

그 결과 정부에 등록된 석유 수입사가 한때 40곳을 넘었고 내수 경질유 점유율은 10%에 육박할 정도의 지배력을 행사했다. 주유소에 외국인 직접 투자가 허용됐고 정유사에 외국자본이 투자할 수 있는 지분 한도가 폐지되면서 아랍에미레이트 IPIC가 한국 정유 시장에 진출하는 계기도 마련됐다. 모습은 다르지만, 우리나라와 일본 정유산업 재편의 길목에서는 석유산업 자유화와 대외 개방에서 촉발된 경쟁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정유산업은 또 다른 재편의 길목에 서 있다. 그린모빌리티 중심의 에너지 전환이라는 환경 변화가 정유 산업의 체질 개선과 혁신을 주문하고 있는데 그 과정에서 생존하기 위한 어렵고도 가혹한 경쟁은 이제 막 출발선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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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 - 에너지플랫폼뉴스

전북대학교에서 독어독문학을 전공했다. 하지만 전공과는 상관없는 에너지 분야 전문 언론에서 20년 넘는 세월을 몸담고 있는 에너지 분야 전문 기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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