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6월 18일 실시된 제13대 이란 대선에서 보수 강경파 라이시(Ebrahim Raisi) 후보가 당선됐다. 보수파가 장악한 헌법수호위원회의 입후보 자격심사에서 당선 가능권에 있던 온건파 후보들이 대거 탈락하면서, 이들을 지지하던 도시 중산층과 젊은 세대의 투표 보이콧, 트럼프(Donald Trump) 미정부의 고강도 제재를 막지 못한 현 온건파 대통령과 외무장관을 향한 저소득층의 실망 때문에 라이시가 손쉽게 대권을 쥐었다. 최고지도자 하메네이(Ali Khamenei)의 제자이자 충복인 라이시 대통령 당선인은 이번 승리로 차기 최고지도자가 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2021년 4월부터 오스트리아 빈에서 시작한 이란 핵 합의(포괄적 공동 행동계획, JCPOA) 복원 협상은 6월 20일 6차 모임을 마치고 휴식기에 들어갔다. 이란 대선 결과 발표 직후, 협상 당사국인 P5+1(미국, 영국, 프랑스, 중국, 러시아+독일), 유럽연합, 이란이 내린 결정이다. 6번에 걸친 협상에서 이란은 최대 규모의 제재 해제를, 미국은 최소한의 형식적 복귀를 원하면서 입장차가 좁혀지지 않았다. 이란은 현 온건파 정부가 물러날 때까지 협상하지 않을 것이고, 새로운 정부는 지금과 같은 방식의 협상 틀에서는 대화에 나서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새로운 형식의 협상이 무엇인지는 밝히지 않고 있다.
대선 이후 이란 새 정부 출범을 위한 인수작업이 빠르게 진행되면서 차기 행정부는 강경파 인사로 채워지고 있다. 행정부까지 장악한 이란 강경파 보수 지배 연합은 미국 제재에 따른 극심한 경제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미국의 핵 합의 복원안을 받아들일 것으로 보였으나, 현재 흐름은 더 많은 것을 얻어내기 위해 강수를 두는 형국이다.
한편 바이든(Joe Biden) 미 정부는 트럼프가 파기한 핵 합의를 형식적으로나마 빨리 복원한 후 중국 견제와 쿼드 활성화, 기후변화 정책에 집중하고자 한다. 내년 중간선거를 고려하면, 중동에 얽매인 모습은 생산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은 이란의 동결자산 일부 해제, 예외조항을 둔 제한적 원유 수출을 허용하는 선에서 핵 합의 복원안을 제시하고, 이란은 이를 받아들이면서 대내외에 자신의 승리라고 과시할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라이시의 당선 이후 라이시측 인사들은 로하니 정부와 차별점을 부각하려는 듯, 협상 대표인 아락치(Abbas Araqchi) 외무차관이 가져온 6차 핵 협상안 내용이 의회가 법으로 만든 핵 협상 지침을 담지 못했다고 강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6월 14일 새롭게 들어선 이스라엘의 연립 정부는 과거 네타냐후(Benjamin Netanyahu) 정부와 다르게 미 민주당 정부와 관계 복원에 집중하고 있다. 이에 화답하듯, 바이든 정부 역시 이란 핵 합의 복원 과정에서 이스라엘과 입장 조율에 힘쓰고 있다. 이스라엘은 핵 합의 복원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되, 복원 이후 이란 강경파와 이들이 후원하는 역내 이란 프록시 조직에 대해 군사작전을 벌이며 세력 억지 및 관리에 집중할 것이다. 아랍에미리트(UAE)와 사우디아라비아 또한 핵 합의 복원에 따른 경제적 이익으로 이란 강경파가 역내 팽창주의 행보를 더욱 강화할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이들 양국은 2020년 10월 아브라함 협정 체결 이후 조직된 수니파 걸프국-이스라엘 간 전략적 연합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안보 협력을 강화하면서 이란에 맞설 것이다.
1. 2021년 이란 강경파 대통령의 당선과 ‘민주주의 없는 선거’ 체제 심화
가. 이란 13대 대선 : 강경파 승리, 낮은 투표율, 높은 무효표
이번 이란 대선에서 하메네이 최고지도자의 제자인 라이시 후보가 62%라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선됐지만, 투표율은 불과 48.8%로 1979년 이란이슬람공화국 수립 이래 치른 대선에서 가장 낮았다. 로하니(Hasan Rouhani)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한 지난 2017년 대선 투표율 73%보다 25%가량 낮은 수치다. 새로운 대통령과 보수파는 취약한 정당성을 의식한 듯, 낮은 투표율을 코로나19 탓으로 돌렸다. 그러나 낮은 투표율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370만 표에 달하는 무효표다. 라이시에 이어 2위를 기록한 레자이(Mosen Rezaei) 전 혁명수비대 사령관 후보가 얻은 340만 표보다 무려 30만 표가 더 많다. 싸늘한 민심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란 대선은 투표용지에 지지 후보자의 이름을 직접 적는 방식인데, 이번 선거에서는 예전과 달리 이름 철자가 조금 틀려도 유효표로 간주한다는 발표에도 불구하고 무효표가 많이 나왔다. 2017년 대선 무효표가 3%에 불과한 데 비해 이번 대선 무효표는 무려 13%로 단순한 실수로만 보기에는 석연찮다.
올해 61세인 라이시는 4년 전 대선에 출마하여 38.2%의 지지를 얻었으나 57.1%를 득표한 현직 로하니 대통령에 고배를 마셨다. 라이시 당선자는 하메네이가 최고지도자직에 오른 1989년 이래 보수 지배 연합의 거점으로 부상하고 있는 동북부 호라산(Khorasan)주의 성소도시 마슈하드(Mashhad) 태생이다. 5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으나, 신학 공부에 매진해 20대에 검사직에 올랐다. 그런데 라이시가 혁명 이후 걸어온 ‘꽃길’은 동향의 스승 하메네이의 보살핌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메네이는 라이시를 지난 대선 전에는 이란 최고의 종교재단(본야드)인 ‘이맘 레자(Imam Reza) 재단’ 대표로 임명하였고, 대선 패배 후에는 사법부 수장직에 앉혔다. 미국 정부는 이란 최고지도자가 공직에 임명하는 사람을 제재한다는 행정명령 13876호에 따라 2019년 3월 사법부 수장이 된 라이시를 같은 해 11월 제재대상인물 명단에 올렸다. 라이시는 1988년 정치범에게 사형판결을 내린 이른바 ‘죽음의 위원회’ 판사 5명 중 한 명으로, 지난 2017년 대선뿐 아니라 이번 대선에서도 국내외로부터 강력한 비판을 받았다.
이번 대선의 낮은 투표율과 높은 무효표 등 유권자의 정치불신과 외면은 무엇보다도 헌법수호위원회의 자격심사가 촉매제가 되었다. 보수파가 장악한 헌법수호위원회는 6월 18일 선거에 앞서 5월 16일에 시작한 자격 심사에서 나이, 교육 정도, 경력 수준 등의 이유를 들어 내무부에 출마 신청을 한 출마 희망자의 99%를 탈락시켰다. 여성 후보 등록자 40명 전원을 포함하여 모두 585명의 출마 신청자가 자격 미달 선고를 받았다. 자격심사를 통과한 최종 후보자는 모두 7명인데, 사법부 수장 라이시를 제외하고는 모두 지지기반이 약하여 라이시에 필적할 수 없는 후보들이었다. 정치적 경향을 보면 7명의 후보는 보수파 5명, 중도파 1명, 개혁파 1명이다.
입후보 자격심사는 유독 온건 개혁파 후보에게 가혹하였다. 5월 2일 이란 개혁파 모임인 ‘이란개혁전선(Jabhe-ye Eslahat-e Iran)’은 자체 투표를 통해 1위 자리프 외무장관, 2위 자한기리(Ishaq Jahangiri) 제1부통령, 3위 타즈자데(Mostafa Tajzadeh) 전 내무차관 등 14명의 개혁파 후보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들 중 단 한 명도 대선 후보로 출마하지 못하였다. 출마를 포기한 자리프를 제외한 13명은 모두 헌법수호위원회 심사의 벽을 넘지 못하였다. 또한 초대 최고지도자 호메이니(Ruhollah Khomeini)의 손자로 개혁파 차기 지도자로 꼽히는 하산 호메이니(Seyed Hassan Khomeini)는 하메네이 현 최고지도자의 ‘압박성’ 충고에 따라 대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이번 자격 심사에서 모두의 예상을 깨고 놀랍게도 탈락한 출마 희망자는 합리적 보수파로 분류되던 라리자니(Ali Larijani) 전 국회의장이다. 시아파의 ‘바티칸’으로 불리는 성소도시 곰의 유력한 성직자 집안 출신 라리자니가 대선 후보로 나올 경우 라이시로 향할 보수표가 분산될 수 있고, 라리자니를 중심으로 반라이시 세력이 결집할 가능성이 있어 출마를 저지한 것이다. 이슬람 법학자 울라마와 혁명수비대가 구축한 보수 지배 연합이 라이시 대통령 만들기에 방해가 될 수 있는 어떠한 요소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인 것이다. 이러한 심사 결과에 온건 개혁파 지지 세력인 도시 중산층, 청년층, 여성 유권자가 선거에 등을 돌렸다.
이란의 직접 선거 출마는 헌법수호위원회의 후보 등록자 자격 심사를 반드시 통과해야만 가능하다. 헌법수호위원회는 이슬람법 전문가 6명과 여러 분야의 법에 능통한 무슬림 법률가 6명 등 모두 12명으로 구성된다. 이슬람법 전문가는 최고지도자가 직접 선정하고, 무슬림 법률가는 최고지도자가 임명한 사법부 수장이 의회에 추천하여 의회가 투표로 선출한다.
이처럼 헌법수호위원회의 자격심사가 선거 출마자를 결정하는 이란은 “민주주의 없는 선거(elections without democracy)를 행하는 혼합 체제(hybrid regime)”에 해당한다. 1979년 반독재 시민혁명이 일어나 당시 팔레비(Mohammad Reza Pahlavi) 왕정이 무너지고 교조적인 이슬람 공화국이 출범했다. 팔레비 체제의 경우 한 사람이 사유화한 권력이 친서구 부정부패 정권을 지배했다면, 이슬람 공화국은 울라마와 체제 수호의 정예군 혁명수비대가 보수 지배 연합을 구성하여 권력을 장악하고 있다. 1,400여 년 전 등장한 이슬람에는 공화제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이란이슬람공화국 대내외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문제는 울라마의 ‘이즈티하드(ijtihad, 독립적인 판단)’에 맡긴다. 이란이슬람공화국에서는 이슬람법 전문가로 구성된 전문가의회(현재 88명, 8년 임기)가 뽑은 종신직 종교지도자가 국민 전체가 직접 뽑은 대통령보다 강력한 권한을 행사한다. 최고지도자는 군부와 사법부, 외교권을 장악하며 대통령의 결정을 포함한 대부분의 정책을 거부할 수 있고, 혁명수비대의 보위를 받고 있다.
이란 보수 지배 연합은 제재 완화로 이란을 정상 국가로 만드는 것보다는 반미 구호를 앞세워 역내에 이슬람 혁명을 수출하고 프록시 조직을 육성하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 대통령과 행정부, 의회에 대한 최고지도자의 힘의 우위가 제도적으로 보장되면서 울라마-혁명수비대 보수 지배 연합은 시민의 요구를 억눌러왔다. 이들 보수 지배 연합은 이슬람 혁명 정신에 바탕을 둔 국가 이익을 추구했고, 비효율적 공기업의 비대화, 관료의 부정부패, 급진적 대외정책 때문에 정책의 투명성이나 집행력은 현저히 떨어졌다. 혁명수비대 산하 바시즈 민병대는 소규모 민생고 시위도 강경 진압해 반체제 여론이나 움직임을 용납하지 않는다. 혁명수비대 내부에서 대외 전략을 맡은 쿠드스 부대는 레바논의 헤즈볼라, 시리아의 친이란 민병대, 이라크의 카타이브 헤즈볼라를 포함한 인민동원군, 예멘의 후티 반군, 가자지구의 하마스 등 역내 프록시 조직을 후원하며 헤게모니 장악에 주력해왔다.
나. 강경파의 차기 최고지도자직 다지기, 온건파의 정치적 무력감 확산
이번 대선에서 강경파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이란 내부 권력은 보수파가 온전히 장악하게 됐다. 2020년 총선 역시 보수파의 대승, 개혁파의 참패였다. 2013년 대선, 2014년 총선, 2017년 대선은 모두 온건 개혁파가 승리를 거뒀으나, 2018년 트럼프 정부의 대이란 최대 압박 정책 이후 판세가 뒤집혔다. 핵 합의를 지지한 온건파의 입지는 현저히 위축됐지만, 강경파의 장악력이 공고해졌다. 더구나 2020년 1월 미국이 쿠드스 부대 솔레이마니(Qasem Soleimani) 사령관을 암살한 이후 강경파는 온건파를 향한 압박수위를 더욱 높였다. 혁명수비대는 내부 숙청작업을 마치고 전열을 가다듬은 뒤 급진 대외정책 구호를 연일 쏟아냈다. 2021년 1월에는 미국의 대이란 제재에 따라 금융기관이 원유 수출 대금을 지불할 수 없는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호르무즈 해협에서 한국 선박을 나포해 한국 정부를 강력하게 비난하며 지불 압력을 가하기도 했다.
대선 이후 온건파 정치인은 물론 이들의 전통적 지지세력인 중산층, 청년, 여성은 이란이슬람공화국의 선거 권위주의 체제를 재차 각인하고 정치적 무력감에 빠졌다. 설리번(Jake Sullivan)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이란 외교안보 정책의 최종 결정권자가 대통령이 아니라 하메네이 최고지도자이기 때문에 이번 대선이 핵 합의 복원 과정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팽창주의 대외정책과 비효율적 경제정책에 따른 경제 위기, 구조적 부정부패, 철권통치로 대표되는 이란의 총체적 문제를 조금이나마 개선할 수 있는 세력은 온건파 세력밖에 없다. 선출 대통령과 의회의 권한이 지나치게 취약하지만, 이들의 존재 자체가 강경 보수파에게 견제와 압박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번 대선은 차기 최고지도자 선출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 관심이 더욱더 높았다. 호메이니에 이은 현 2대 최고지도자 하메네이는 고령인 데다 투병 중이다. 대통령으로 재선되어 재임하고 있던 하메네이는 1989년 호메이니가 사망하자 전문가의회에서 최고지도자로 선출되었다. 차기 최고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대통령직을 수행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 유리하다는 것이 중평이다. 그렇다면 라이시 대통령 당선인은 이번 대선에서 차기 최고지도자직을 향한 디딤돌을 마련한 셈이다. 하메네이의 차남 모즈타바(Mojtaba Khamenei)가 아버지를 이어 최고지도자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현재 최고지도자 업무의 상당 부분을 모즈타바가 수행하거나 돕는다는 평이 서방 언론에서는 꾸준히 흘러나온다. 그러나 이란이 혁명한 이유 중 하나가 세습 왕정을 없애기 위한 것이었다는 간접적 비판처럼 최고지도자직이 세습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물론 이론적으로는 전문가의회에서 결정하면 가능하다. 라이시와 모즈타바는 끈끈한 우호 관계를 유지해왔다. 향후 이 두 사람의 협력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는지가 초미의 관심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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