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칼럼] 늘어나는 전기 수요 충족을 위해 전력망 점검에 나선 주요국

GS칼텍스 -

미국 에너지 규제 당국이 10여 년 만에 전력망 관련 규칙을 개정했다. 전기자동차, 히트 펌프 등 탄소중립 추진에 따른 ‘모든 것의 전기화’로 늘어나는 전기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서다. 최근엔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열풍까지 가세해 전력망의 안정성을 뒤흔들고 있다. 이번 전력망 규칙 개정으로 조 바이든 행정부가 친환경 산업 공급망을 육성하기 위해 통과시킨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의 효과가 더욱 탄력을 받을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장기 전력망 계획 세워야… 전력망 규칙 13년만에 개정

미국 연방에너지규제위원회(FERC)는 지난달 “전력망 계획 및 자금 조달 방식에 대한 새로운 규칙을 의결했다”고 발표했다. FERC가 전력망 규칙을 개정한 것은 13년 만이다. 미국에선 발전 유틸리티와 지역별 전력망 운영 사업체가 동부, 서부, 텍사스 등 구획별로 나뉜 전력망을 관리하고 있다. 이번 연방 규칙은 텍사스 전력망을 제외한 동부와 서부 전력망에 적용된다.

새 규칙은 전력망 운영사가 앞으로 20년 이상 장기적인 관점에서 발전원 다변화, 기상이변 등 다양한 요인을 고려한 계획을 세우도록 했다. 전력망 용량이 부족한 지역 등에서 추진하는 필수 프로젝트를 신속하게 허가해야 한다는 내용도 담겼다. 전력망 운영사는 신규 전력망의 이점을 평가해 기업, 가정 등 전기 소비처와 발전사가 전력망 확충 비용을 공평하게 분담하는 방안도 고안해야 한다.

또한 초기 비용이 다소 들더라도 기존 송배전선보다 두 배 이상 더 많은 전류를 전달할 수 있는 초전도케이블 등의 설치를 유도하려는 구상이다. FERC는 “전력망 확장 속도가 더딘 가장 큰 이유는 사업자들이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지 않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발전 프로젝트 개발업체가 기존 전력망에 연결을 요청하거나 전력망의 안정성 문제가 불거졌을 때만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땜질식 처방’을 반복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윌리 필립스 FERC 위원장은 “미국이 (IRA, 반도체법 등에 의한) 제조설비 급증, 데이터센터 확대, 기상이변 등으로 인해 (전력 수요가 폭증하고) 과부하가 빈번해지는 시기에 들어섰다”고 했다. 이어 “미국 전력망의 신뢰도와 경제성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더 빨리 조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재 건설 중인 고압 전력선이 충분하지 않아 증가하는 전력 수요에 대처하는 게 어려워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신재생에너지 발전원 등 분산 전원을 전력망에 연결하는 것도 더뎌졌다. 강풍, 산불 등 기상이변으로 인한 정전 위험도 커지고 있다.

전력망 확충,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에 탄력을 받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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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RC에 따르면 현재 미국 내에서 전력계통에 연결되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발전·전력저장 프로젝트가 2022년 기준 2,000건을 넘어섰고, 이들의 평균 대기 시간은 최소 5년 이상이다. 뉴욕타임스(NYT)는 “IRA가 발효된 이후 에너지 기업들이 1만 1000개 이상의 풍력, 태양광, 배터리 저장 장치 등 신재생에너지 프로젝트를 제안했지만, 이를 수용할 수 있는 전력망 용량이 충분하지 않아 많은 프로젝트가 답보 상태에 있다”고 전했다.

전력망 규칙을 개정한 FERC에 이어 미국 에너지부도 거들고 있다. 에너지부는 지난달 “연방 소유 토지를 통과하는 주(州) 간 송전선에 대한 환경영향 검토를 직접 맡을 것”이라며 “2년 이내에 필요한 허가를 내주겠다”고 발표했다. 에너지부는 2035년까지 청정에너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각 주 내 송전용량은 2배로, 주 간 송전용량은 5배로 늘려야 한다고 보고 있다. 송전망 개선을 위해서는 200억 달러를 투입할 계획이다.

전력망 확충은 바이든 행정부와 민주당이 추진하는 IRA 도입의 전제조건이기도 하다. 미 프린스턴대 연구진은 “전력망 확충 속도를 개선하지 않으면 IRA에 의한 탄소 배출량 감축 기대분(입법 효과)의 80% 이상이 손실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척 슈머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는 지난주 한 언론 인터뷰에서 “산에 멋진 풍차가 있어도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친환경 전기를 실어 나를 수 없다면 무용지물”이라며 송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수명 다한 전력망, 화재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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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망은 발전소에서 생산된 전기를 가정이나 기업 등 수요처까지 전송하는 네트워크다. 전기가 고전압으로 빠르게 이동하는 송전선(고속도로)을 지나 이를 낮은 전압으로 바꾸는 변전소(출구 램프)를 통과하면 배전선을 통해 동네 전봇대 등에 흘러 들어간다. 이 전력망은 매 순간 균형을 이뤄야 한다. 전력 품질이 안정적이라는 것은 전기의 흐름이 균일하고 예측 가능한 전압과 속도로 전달돼 전력 소비가 언제나 발전량과 일치한다는 뜻이다.

전기 주파수가 표준(미국 50㎐, 아시아 60㎐)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전력의 수요나 공급 중 어느 한쪽이 급증해 과전류 상태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 인해 전력 품질에 문제가 발생해 전력 설비의 수명이 짧아지고 고장이 잦아지며, 정전이나 화재로 이어지기도 한다. 전력 공급이 수요에 비해 지나치게 많아도 문제다. 주파수에 좌우되는 터빈이 헛돌면서 발전소가 고장 나기 때문이다.

전력망이 받는 스트레스는 최근 전례 없는 속도로 가속화되고 있다. 미국, 유럽 등 선진국의 전력망은 70%가량이 1970년대 세워져 사실상 수명이 다해가고 있는 가운데 분산 전원이자 유량(flow) 자원인 신재생에너지의 변동성 적응에 필요한 대대적인 정비 작업이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다. 암호화폐 채굴, 인공지능(AI) 열풍 등으로 전력 수요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었으며 최근 몇 년 사이에 극심해진 이상 기온 역시 가뜩이나 낡은 전력 인프라의 부담을 더욱 가중 시키고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최근 “미 전역의 노후화 된 전력망이 가중되는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해 화재의 발화점이 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블룸버그통신도 “갑작스러운 전압 서지 또는 강하는 대형 화재로 이어진다”고 전했다. 지난해 6월 매사추세츠주 월섬에서 변전소의 전압이 갑자기 불안정하게 급상승하면서 화재가 발생했다. 두 달 뒤 하와이 마우이섬에서 발생한 대규모 산불은 끊어진 전선에서 튄 불꽃이 도화선이 되며, 지역 송전망 운영사인 하와이안 일렉트릭이 집단 소송을 당했다.

올해 2월 미국 텍사스주 역사상 최대 규모의 산불을 일으킨 발화점도 엑셀에너지의 전선 설비에서 비롯된 것으로 조사됐다. 벅셔해서웨이의 계열사인 미국 서부 최대 전력기업 퍼시픽코프가 산불의 주범으로 낙인 찍힌 뒤 최근 워런 버핏 벅셔해서웨이 회장은 “더 이상 유틸리티 기업에 투자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퍼시픽코프의 배상금이 눈덩이처럼 불어난 것에 대한 울분이었다. 그는 “전력 유틸리티 업계의 말로는 불길할 수 있다”며 “화재 사태가 진정되면 미국의 전력 수요와 그에 따른 자본 지출은 충격적일 것”이라고 우려했다.

전력망 안정화, AI로 해결할 수 있을까?

최근엔 불안정해진 전력망을 효율화하기 위해 AI를 동원하고 있다. 전력망을 전면 교체하거나 용량을 늘리는 작업도 중요하지만 기존의 전력망을 안정화하는 작업도 수반돼야 하기 때문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모순적이게도 에너지 집약적인 AI를 활용하는 것이 전력망을 안정화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며 “AI는 데이터센터의 전력 수요를 증가시킬 것이 분명하지만, 이러한 급증을 상쇄할 수 있는 해답도 될 수 있다”고 전했다. AI를 통해 주거용, 상업용 등 건물의 전기 소비량을 절약하거나 수급을 조절해 전력망의 스트레스를 낮출 수 있다는 분석이다.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 연구원인 그레천 바크는 저서 ‘그리드’에서 “전력망 업그레이드 문제는 마치 항공기가 승객을 가득 채운 채 비행하는 상태에서 착륙하기 전에 활주로와 항공관제 시스템 등을 재구축하는 것과 같다”며 전기 의존도가 최고조에 이른 현대사회가 전력 공급이 중단되는 일 없이 인프라를 전면 교체하기 위해서는 고난이도의 작업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 본 콘텐츠는 한국경제 김리안 기자의 기고를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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