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미술관 산책 03월] 꽃무리를 길러낸 온화한 햇살을 오롯이 담아내다, 귀스타브 카유보트 ‘쥬느빌리에 노란 꽃무리’

GS칼텍스 -

세계 유명 미술관과 명화를 소개하는 2019 GS칼텍스 캘린더 3월 이야기입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낳은 미술관

독일의 서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州], 라인 강 연안에 위치한 도시 쾰른에는 발라프 리하르츠 미술관(Wallraff-Richartz Museum)이 있습니다. 쾰른 하면 600년에 걸쳐 지어진 로마 카톨릭 교회이자,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쾰른 대성당’이 가장 먼저 떠오를 텐데요. 대성당 참사 회원이자 철학자였던 페르디난트 프란츠 발라프가 작품을 기증하고, 쾰른의 거부 상인 J.H. 리하르츠의 기부금으로 고딕 교회를 개조하여 1854년 독일의 대표적 고전 미술관으로서 개관되었습니다.

[세계 미술관 산책] 꽃무리를 길러낸 온화한 햇살을 오롯이 담아내다, 귀스타브 카유보트 ‘쥬느빌리에 노란 꽃무리’
쾰른의 모습
미술관은 마틴 거리의 성 알반 교회 옆에 있습니다. 멀리 보이는 쾰른 대성당의 거대한 장식품이 시선을 끄는 것과는 전혀 다르게, 발라프 리하르츠 미술관의 외관은 궁극의 심플함을 지향한 직육면체 건물입니다. 전시 현수막이 없다면 미술관 건물임을 금방 인지하기 쉽지 않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소장품은 매우 다양하고 알찹니다.
중세 때 발전한 도시에 세워진 미술관이라서 그런지 중세의 종교적 주제의 작품이 많고, 르네상스 시대의 작품, 17세기 이탈리아와 스페인 작품, 19세기 프랑스와 독일 작가들의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쾰른 출신 법률가이자 미술 수집가였던 하우브리히도 1946년 수집한 작품들을 기증했습니다. 1914~1939년 작품들로, 샤걀의 그림부터 20세기 초 독일에서 탄생한 표현주의 미술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치에 의해 독일 미술작품들이 많이 소실된 상황에서 이러한 20세기 초의 기증 작품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이처럼 발라프 리하르츠 미술관은 많은 사람들의 기증과 기부를 통해 세워지고 완성된 미술관으로, 그 뜻을 지속적으로 기리기 위해 미술관 이름도 ‘발라프’와 ‘리하르츠’의 이름을 담아 지어졌습니다. 높은 사회적 신분을 가진 사람들의 자발적 사회적 기여가 빛나는 미술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술과 자본에 매혹된 파리를 기록하다

발라프 리하르츠 미술관에서는 프랑스의 인상주의 화가, 귀스타브 카유보트(Gustave Caillebotte, 1848~1894)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는 20대 초반에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던 이력이 있지만, 그림에 뜻을 두고 에꼴 데 보자르에 입학했습니다. 그러나 살롱에 출품한 그림이 거부당하자 학교를 그만두고 자신만의 커리큘럼으로 그림 공부를 합니다. 카유보트는 주로 파리 중심가에 있는 건물과 오스만의 재개발 정책에 의해 정비된 파리 거리, 기술과 자본에 매혹된 부르주아의 거리를 마치 카메라로 기록하듯 그려냈습니다. 그림 창작도 법률 공부하듯 학구적인 자세로 이어갔습니다.

[세계 미술관 산책] 꽃무리를 길러낸 온화한 햇살을 오롯이 담아내다, 귀스타브 카유보트 ‘쥬느빌리에 노란 꽃무리’
파리의 정돈된 거리의 모습

가난한 인상주의 화가들을 지원하다

오늘날 카유보트는 사랑받는 인상파 화가 중 한 명이 되었지만, 오랜 세월 동안 그에 대한 서양미술사의 평가는 ‘예술가’ 보다는 ‘인상주의 화가들의 후원가’로 기록되었습니다. 물려받은 상위 계층의 삶이 그의 예술적 성취를 가린 경우였습니다. 그는 군수물자 사업가이자, 판사였던 아버지로부터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은 거대 자본가였습니다.

카유보트는 그런 조건을 활용해, 당시 반항적인 젊은 화가들로 치부되며 아카데미와 살롱의 기성 화단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던 르누아르•모네•드가 등 인상파 화가들을 위한 전시회를 기획하거나, 전시회에 걸린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을 적극 구입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가난한 화가들을 지원했습니다. 그렇게 소장한 작품들을 미술관에 기증함으로써, 현재의 미술 애호가들이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을 풍성하게 경험하는데 큰 기여를 하고 있는 셈입니다.

카유보트는 부유하게 자랐지만, 일찍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을 만큼 똑똑했고, 미술적 재능과 열정도 있었으며, 거기에 성품도 좋았던 모양입니다. 그러고 보니,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세운 발라프 리하르츠 미술관에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화가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는 것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파리 북부의 외곽도시, 쥬느빌리에의 넘치는 빛을 담아내다

[세계 미술관 산책] 꽃무리를 길러낸 온화한 햇살을 오롯이 담아내다, 귀스타브 카유보트 ‘쥬느빌리에 노란 꽃무리’
쥬느빌리에 노란 꽃무리, 1884년, Oil on canvas, 54×65cm
이제 카유보트의 1884년작 ⌈쥬느빌리에 노란 꽃무리⌋를 만나봅시다. 그림의 대상이 된 ‘쥬느빌리에’는 파리 북부에 위치한 외곽도시입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구불구불한 센 강이 쥬느빌리에 지역을 포근하게 감싸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지리적으로 화려하고 부유한 파리와 근접해 있지만, 이 변두리 도시는 소박하다 못해 황량해서 경제적•정서적 간극이 너무 크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의 주거지는 좁고, 산업자재들을 생산하는 공장지대가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그러나 카유보트가 작품을 그린 당시의 쥬느빌리에는 전혀 다른 분위기로 넓은 평야가 화사한 노란 꽃들로 가득한 풍경입니다. 끝없이 펼쳐진 꽃들의 대지와 맞닿은 하늘 중간에 포플러 나무가 줄지어 서 있습니다. 노란 꽃무리는 카놀라(유채꽃), 튤립, 매리 골드(금잔화), 들국화 중 어떤 꽃일지 궁금증이 생깁니다. 자세히 보면, 노란 꽃무리의 모습이 마치 자로 잰 듯이 규격화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연스러운 야생 꽃 군락지가 아닌 대단위로 꽃을 재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노란 꽃무리는 장식용 혹은 식용유• 치료약• 차 등으로 상품화되기 위해 키워지고 있습니다. 이왕이면, 자연을 훼손하며 공장을 세우기 보다는, 흙에서 꽃을 키워내는 행위는 생명의 대지를 위해서도 지역주민들의 시각과 후각 및 정서에도 좋은 일일 것입니다. 노란 꽃들을 키워내기 위한 여러 조건들 중 온화한 햇살은 가장 중요합니다. 빛의 화가인 인상파 화가에게 쥬느빌리에의 넘쳐나는 빛은 축복이었을 겁니다.
카유보트는 노란 꽃이 핀 쥬느빌리에의 동일한 풍경을 각도를 달리하고, 시간을 달리해서, 여러 편 그렸습니다. 파리 근교에 위치해서 파리지앵들이 휴일을 즐기는 유원지였던 ‘아르장퇴유 언덕’에서 이젤을 세워 놓고 센 강이 흐르는 쥬느빌리에 평야를 그렸는가 하면, 센 강변을 개와 함께 산책하는 신사를 그리기도 하고, 쥬느빌리에의 작은 텃밭을 그리는 등 일일이 언급하기엔 지면이 모자랄 지경입니다.
그러고 보니, 넓은 평야에 쏟아지는 풍족한 햇살은 인상파 화가의 그림 창작의 조건뿐만 아니라 실제 주거 조건에도 좋은 환경입니다. 그는 최신식 건축공법으로 지은 파리 중심부 건물 외에도, 쥬느빌리에 지역에도 멋진 집과 텃밭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19세기 쥬느빌리에가 위대한 창작의 산실이었음을 알 수 있는 단서는 현재에도 도시 곳곳에 남아있습니다. 에밀 졸라 거리, 끌로드 드뷰시 거리, 빅토르 위고 거리 등을 이름으로 가진 거리들이 있다는 점도 그렇고, 쥬느빌리에 미술학교에는 ‘에두아르 마네 갤러리’가 있다는 점도 그렇습니다. 인상주의 및 근대미술의 아버지로 불리는 마네도 이곳에서 살았던 것입니다.
카유보트의 쥬느빌리에 그림 시리즈 중엔 ‘쁘띠 쥬느빌리에’라는 작품명을 가진 그림들이 적지 않습니다. ⌈쥬느빌리에 노란 꽃무리⌋ 풍경 그림은 공장지대로 개발되기 전의 모습으로, 빛을 관찰하던 인상파 화가의 시선과 막대한 자산가의 주거지로서 매력을 품고 있는 ‘정다운, 사랑스러운, 작은’ 풍경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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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수 - 미술서 작가, 전시총감독

대중에게 그림을 통한 지적 유희와 감정적 치유를 경험하게 하고자 지속적으로 미술서 출간, 전시기획,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작아도 강한, 큐레이터의 도구>, <옛 그림에도 사람이 살고 있네>, 등 12권 집필. 하나코 갤러리 경영 및 SBS기획전시 총감독 등 다양한 전시현장에서 전시기획 수십여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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