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유명 미술관과 명화를 소개하는 2019 GS칼텍스 캘린더 4월 이야기입니다.
집요한 관찰을 통한 극사실적인 묘사, 플랑드르 회화
서양미술사의 본고장은 그리스, 이탈리아입니다. 그러나 유화물감의 발명과 지극히 사실적이고 꼼꼼한 묘사에서 탁월한 성과를 낸 곳은 바로 북유럽인 ‘플랑드르’ 지역입니다. 오늘날 네덜란드 남부지역과 벨기에가 바로 그곳이죠. ⌈플란다스의 개⌋에 등장하는 그림을 잘 그리는 착한 소년 네로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플랑드르란 곧 영어로는 플란더즈(Flanders), ‘낮은 땅’ 이라는 뜻입니다. 네덜란드라는 이름도 마찬가지의 뜻입니다. 수면보다 낮은 저지대의 척박한 땅인 이곳은 미술사적으로는 대단히 중요한 곳입니다. 대표적인 작가로는 얀 반 아이크, 홀바인, 캉팽, 브뤼헐, 히에니무스 보스, 베르메르, 그리고 그 유명한 렘브란트와 루벤스 등이 있습니다.
이 지역을 중심으로 발달한 플랑드르 회화의 특징은 집요한 관찰력을 바탕으로 한 극사실적인 묘사에 있습니다. 단지 똑같이 그리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디테일의 묘사에서 가히 일품이란 얘기죠. 이는 그만큼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태도, 보이는 것에 의미를 두는 실증적이고 합리적인 자세 등을 반영합니다.
벨기에를 대표하는 최고의 미술관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에는 벨기에왕립미술관(Royal Museums of Fine Arts of Belgium)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벨기에를 대표하는 최고의 미술관입니다. 그 옆에는 마그리트 미술관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벨기에가 자랑하는 초콜릿 상점들도 즐비합니다. 아마도 벨기에를 방문하는 여행객들이 가장 많이 모여드는 공간이 바로 이 미술관 주변일 것입니다.
벨기에왕립미술관은 유럽의 다른 유명 미술관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장품의 숫자가 적은 편이지만, 질적 측면에서는 결코 뒤쳐지지 않습니다. 작품 수가 적은 이유는 많은 예술품이 과거 이곳을 지배했던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로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미술관의 내부 구조는 15세기부터 18세기까지의 작품을 전시한 ‘고전 미술관’과 19세기부터 현대까지의 작품을 전시한 ‘현대 미술관’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두 곳은 통로를 통해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벨기에를 중심으로 한 플랑드르파 화가들의 뛰어난 작품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유럽의 미술관 중에서 가장 최고의 수준일 것입니다.
그러나 플랑드르파 뿐만 아니라 자크 다비드의 작품들도 적잖게 소장되어 있습니다. 프랑스 혁명의 열렬한 지지자이자 나폴레옹의 총애를 받던 다비드는, 이후 정치적 상황 변화에 따라 부득이 벨기에로 망명하게 되고 결국 이곳에서 죽었습니다. 그의 그림이 벨기에왕립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유입니다.
인상주의 작가들의 작품 그리고 벨기에 출신의 대표적인 현대화가인 마그리트의 걸작들도 이곳을 채우고 있습니다. 특히 초현실주의의 대표작가 마그리트의 그림은 전세계 최고 수준의 컬렉션을 자랑합니다.
색점으로 빛의 움직임을 묘사하는 점묘법
벨기에왕립미술관에서 볼 수 있는 매혹적인 그림의 하나가 바로 조르주 쇠라(Georges Pierre Seurat, 1859~1891)의 ⌈그랑드 자트 섬의 센 강, 봄⌋입니다. 인상주의 이후 선보인 이른바 ‘점묘법’에 의해 그려진 그림으로. 자잘한 점을 캔버스 표면에 나란히 찍어가면서 따뜻한 봄날 강가의 풍경을 차분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점묘법이란 화면에 대비색을 작은 색점들로 병치하여 빛의 움직임을 묘사하는 기법입니다. 붓으로 구체적인 대상을 묘사하는 게 아니라, 물감을 찍어서 화면에 부착할 뿐이죠. 그러나 일정한 거리에서 보면 그 서로 다른 색들이 섞이면서 형태를 안겨주고 명암을 전해줍니다. 그림을 보는 이의 눈의 착시에 의해 사물을 인지시켜 주는 것입니다.
이 점묘법을 처음으로 만들어낸 이가 바로 조르주 쇠라입니다. 쇠라는 인상주의 회화기법을 바탕으로 색채가 시각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과학 이론을 연구했는데, 그 결과 순수한 색채를 규칙적인 작은 점들로 찍는 기법으로 새로운 화면을 연출했습니다. 색들을 섞지 않고 질서정연하게 순수 색을 지닌 점들을 나란히 찍어가면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자연에서 받은 인상, 빛에 의해 파득거리는 대기의 표현에 적합하기에 그와 같은 방법을 고안해낸 것입니다.
신인상주의의 시대를 연 작품, 그랑드 자트 섬의 센 강, 봄
⌈그랑드 자트 섬의 센 강, 봄⌋은 기존의 인상주의 회화 기법과는 다른 신 인상주의의 시대를 연 작품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미술사적으로 가치가 매우 높습니다. 이 작품은 맑은 봄날, 한낮의 센 강 풍경입니다. 햇살이 수면위로 쏟아지고 그에 따라 강의 표면은 빛을 내며 생선의 비늘처럼 파득거립니다. 더없이 화사한 봄날의 정취와 기후가 감촉되는 상큼한 그림입니다.
쇠라는 세계를 온통 빛과 색으로 환원해서 바라보고 이를 그림으로 그린 화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전의 그림은 명확한 형태감∙윤곽선∙정확한 데생에 힘입어 대상이 견고하게 화면을 점유하고 있었다면, 쇠라는 세계를 유동적이고 불확실하며 가변적인 것으로 보았습니다. 따라서 그 변모를 거듭하는 세계를 어떻게 화면에 정착시킬 수 있을까를 고민했고, 그 해결책이 색점을 병렬시켜 찍어놓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색들끼리 부딪히고 뒤섞이면서 혼합되어 보는 이의 망막에 유동적으로 다가와 흔들립니다. 그것이 세계의 참 모습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러니 쇠라는 사실 자신이 본대로, 감각한대로 그림을 그리고자 한 것입니다. 세계의 리얼리티를 추구했다고 말할 수 있죠.
전체적인 구도는 수직과 수평의 선들로 이루어졌습니다. 저 안쪽에 자리한 강둑과 수면, 화면 좌측에 커다랗게 자리한 수직의 나무, 좌측 안쪽에 놓인 성채를 닮은 건축물, 흰 돛대가 수평과 대조를 이루면서 엄정하고 기념비적인 구도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표면은 자잘한 색점들이 픽셀처럼 자리를 차지하면서 반짝입니다. 대상의 윤곽은 사라지고 오로지 빛에 의해 반짝이는 색만이 사물을 대신하고 있는 셈이죠.
그렇게 해서 선명한 색점들이 촘촘히 박힌 화면은 저희들끼리 어우러지고 보는 이의 망막에 번져 실제 자연계가 발산하는 색채에 가장 근접한 세계를 실감나게 보여줍니다. 바로 그런 효과를 내기 위해 쇠라는 점묘법이란 기법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리고 ⌈그랑드 자트 섬의 센 강, 봄⌋은 그런 효과를 충만하게 구현하고 있습니다. 햇살이 반짝이고, 바람이 불고, 유리 같은 수면에는 아름다운 봄날의 풍경이 선명하게 비치고, 모든 것이 느리게 흘러가는 한 순간이 마치 영상처럼 다가오는 듯한 그림입니다.
2019 GS칼텍스 캘린더 ‘세계 미술관 산책’ 칼럼 더보기
- [세계 미술관 산책 01월] 객관적 대상에서 주관적 인상으로, 클로드 모네 ‘인상, 해돋이’
- [세계 미술관 산책 02월] 병렬주의 화법으로 풍경의 본질을 묘사, 페르디난트 호들러 ‘쉬니케 플라테, 오베를랑의 풍경’
- [세계 미술관 산책 03월] 꽃무리를 길러낸 온화한 햇살을 오롯이 담아내다, 귀스타브 카유보트 ‘쥬느빌리에 노란 꽃무리’
- [세계 미술관 산책 05월] 자연과 문명이 만든 풍경을 예리하게 조망하다, 아르망 기요맹 ‘아르쾨유의 수도교와 소 철로’
- [세계 미술관 산책 06월] 탄력적 붓질과 다채로운 색의 환희가 빚어낸 아름다움, 알프레드 시슬레 ‘빌뇌브 라 가렌느의 다리’
- [세계 미술관 산책 07월] 삶의 행복한 표정을 발랄하게 드러내 보이다, 오귀스트 르누아르 ‘보트 파티에서의 오찬’
- [세계 미술관 산책 08월] 마네와 모네의 끈끈한 동지애와 우정을 보여주다, 에두아르 마네 ‘선상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는 모네’
- [세계 미술관 산책 09월] 우리가 겪는 가장 원초적인 시각의 경험, 폴 세잔 ‘생트 빅투아르 산기슭으로 난 길’
- [세계 미술관 산책 10월] 날 것 그대로의 순수하고 건강한 원시적 풍경, 폴 고갱 ‘타히티의 산들’
- [세계 미술관 산책 11월] 낯선 도시의 따스한 봄볕이 잔인하다, 카미유 피사로 ‘대로, 시드넘’
- [세계 미술관 산책 12월] 별은 밤이 짙을수록 더욱 빛난다, 빈센트 반 고흐 ‘별이 빛나는 밤’
박영택 - 기대학교 예술대학 예술학과 교수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미술사 전공, 뉴욕퀸스미술관 큐레이터연수, 금호미술관큐레이터, 2회 광주비엔날레특별전큐레이터, 아시아프전시총감독 등 역임. 경기대학교 예술대학 예술학과에서 학생을 가르치며 <예술가로 산다는 것>,<현대미술의 지형도>,<애도하는 미술> 등 17권의 저서와 다수의 논문 집필.